다시 쓰는 5·18 ⑤ 광주역서 첫 집단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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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5·18 ⑤ 광주역서 첫 집단발포
1인당 실탄 60발 지급…시위대 차량 조준 사격
최세창 3공수 여단장 장착 지시…신군부 발포 사실 은폐
지휘관들은 무공훈장…신 전 소령 “그날밤 광주는 전쟁터”
2018년 05월 29일(화) 19:04
1980년 5월 20일 오후 8시 어둠이 내린 광주역 앞은 당장이라도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은 더욱 거세졌고, 3공수여단 소속 부대원(장교 포함 1477명) 전원은 광주역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했다. 타 지역에서 내려오는 병력과 물자가 집결되는 병참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역 앞은 3공수여단을 둘러싸고 시위대가 포위하는 형세가 전개됐다. 시위대가 전남대 앞 사거리를 막아선 탓에 3공수여단은 애초 주둔지였던 전남대와 병참선이 끊긴 지 오래였다. 몰려 있던 공수부대를 향해 시위대는 차량을 몰아 돌진했고 갑자기 방향을 꺾어 나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현장에 있었던 3공수여단 출신 신순용 전 소령은 “그날 밤 광주는 전쟁터였다”고 기억했다.

신 전 소령은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 타고 있는 광주MBC가 내뿜는 화염과 연기가 보였고, 시위대의 함성소리가 크게 들렸다. 시위대는 차량을 몰고 최대한 공수부대쪽으로 접근했다가 빠져나갔다. 접근한 거리가 가깝고 차량 속도가 빠를수록 시위대쪽에선 박수소리가 크게 나왔다”고 증언했다.

같은 장소에 있었던 3공수여단 14대대 소속 김연철 전 하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굉장히 공포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김 전 하사는 “당시 시위대는 앞부분에 불붙은 기름통을 싣은 픽업트럭을 몰았는데, 갑자기 방향을 꺾을 때 기름이 부대원쪽으로 쏟아졌다”며 “일부 부대원은 온몸에 불이 붙어 끄느라고 난리였고 나 역시 목숨을 걸고 도망치곤 했다. 아무리 훈련을 받은 공수대원이라도 20대 초반 나이에 그 당시 상황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일어난 계엄군의 집단발포 중 5월 21일 오후 1시 옛 전남도청 앞 11공수여단의 집단 발포가 가장 논란이 되고 있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초의 집단 발포는 3공수여단이 자행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2007)에 따르면 5월20일 9시50분께 광주역에서 경계중인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최세창 여단장(준장)은 각 대대에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3공수여단 본부중대 소속 하사 출신 이모씨는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 “3공수여단 작전 참모의 지휘로 본부중대 병력들이 지프와 트럭에 실탄을 싣고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지원 나갔으며, 이를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신 전 소령은 정 중사가 돌진하는 시위대 차량을 몸으로 막아서다 치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20일 밤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가 보이니 트럭을 몰고 왔다. 당시 차량 돌격은 시위대들이 공수부대에 대항하는 주요 수법이었다”며 “20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트럭을 몰고 접근했는데 갑자기 운전병이 튀어나가서 가로 막다 치었다”고 말했다.

신 전 소령에 따르면 운전병이 숨지자 전남대에 있던 대대본부에서 대대장 지프로 실탄을 싣고 왔다. 대대장 지프는 가장 빠른 길이었던 전남대 사거리쪽이 시위대에 가로 막혀 있어서 계림초등학교 쪽으로 우회해 광주역에 도착했다. 각 지역대별로 탄통 1개를 분배했는데 부대원 1인당 60발 분량이었다.

신 전 소령은 “실탄이 분배된 이후 대대본부쪽에서 접근하는 차량 운전자를 조준사격해서 죽였다”며 “발포는 여단장 지시인 것 같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발포는 상부에 보고되지 않았다. 광주에서 작전이 끝난 뒤 작성된 3공수여단의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전투상보)에는 작전 결과에 따른 피해로 ‘민간인 2명 사망, 5명 부상’(폭도의 차량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로 적혀 있다. 즉, 3공수여단의 발포와 구타로 인한 사상자가 폭도의 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로 왜곡됐다. 오히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의 작전은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발사기, E-8 발사통’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며 발포와 과격진압 사실을 은폐했다.

31사단이나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등 상급부대는 3공수여단으로부터 발포와 희생자 발생 사실 등을 공식 보고받지 못했으나 5월 20일 광주역 발포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다. 31사단에는 5월20일 밤11시4분 아세아자동차나 서부경찰서 쪽에서 LMG 연발총성이 들렸던 것으로 최초 보고됐다. 같은날 밤 11시20분 시청 옥상의 공수부대에서 예광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0분 뒤에는 ‘총성이 3, 4발씩 계림동파출소에서 들린다’는 민간인의 신고가 전교사에 접수됐다. 이어 밤 11시35분 보고는, 계림동 사무소에서 얼마 전까지 총성이 들렸으나 현재 군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3공수여단의 상급부대였던 전교사나 31사단에서는 발포 경위 등을 파악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5·18 당시 전남도청 인근에 임시 수습된 희생자 시신들. <5.18기록관 제공>






3공수여단은 발포 이후 전남대로 철수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또 발생한다.

505보안부대의 첩보 문서 ‘광주소요사태’에는 ‘21일 새벽 2시20분 3여단 병력이 전대로 복귀를 위해 탈출 시도, 앞을 가로막는 데모대를 돌파하기 위해 방망이 구타. 사망 2명, 중상 2명 발생’이 적혀있다. 약 2시간 뒤인 새벽 4시40분 보고에는 사망자 1명, 중상자 3명, 경상자 1명으로 정정됐다.

광주역에서 숨진 2명 가운데 한 명은 허 봉씨로 추정되고 있다. 505보안부대에서 작성한 ‘검시참여결과보고’에는 허봉씨가 “5월21일 새벽 2시~3시께 신역(광주역) 앞에서 피를 흘리고 신음하던 중 의사가 없어 사망(구양술 기자 목격 진술)”으로 적시돼 있다. 사인은 망치 등 둔기로 인한 우측 두정골 열상 및 대검 등 예기로 인한 좌측 전두부 자상이었다.

허씨 등 2명의 시신은 광주시민들이 수레에 실어 전남도청 앞으로 옮긴다. 이를 본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한다. 21일 오전 전남도청 앞에는 수많은 항의 인파가 몰렸고 곧 집단 발포가 자행된다.

한편, 3공수여단의 발포가 있자 2군사령부에서는 20일 밤 10시30분을 기해 ‘작전지침 추가’(작상전 444호)를 내려 ‘발포 금지, 실탄 통제. 특전사 부대 임무 20사에 인계(교대) 검토. 특전사 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융통성). 선무공작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5월 21일 자정께 11공수여단 61, 62대대는 중대장들에게 실탄 15발씩을 분배했고, 21일 오전에는 11공수여단 63대대까지 실탄이 분배됐다. 11공수여단은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자행한 부대다.

현재까지도 광주역 앞 집단 발포로 인해 발생한 정확한 피해 상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 나온 사망자 2명과 505보안부대의 광주소요사태에 나온 허봉씨 등 2명이 동일 인물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확실한 건 발포로 인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그에 따른 문책과 경위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부 지휘관들은 광주진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충정작전에 참가해 사태진압 공헌(광주소요사태)으로 1980년 6월20일 충무무공훈장(2006년3월21일 치탈)을 받았으며, 그외 일부 장교.부사관들에게도 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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