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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조위 조사로 드러난 5월의 진실] ④도청 앞 13:30 집단발포 기록 있었다
자료 은폐 및 왜곡
1981년 7공수 35대대 일지
1985년 ‘80 위원회’ 등서 삭제
11공수 대대장 수기 기록
병력들 무릎쏴 자세 일제 사격
2018년 02월 19일(월) 00:00
지금까지 신군부가 줄곧 부인해온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사실을 기록한 군 문서가 처음으로 확인돼 5·18 진상규명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자위권 발동과 실탄지급’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특전여단 상황일지는 군부가 ‘80위원회’(1985), ‘511연구위원회’(1988) 등을 통해 군 관련 자료를 대부분 삭제·왜곡했음에도 보존돼 국방부 특조위에 입수됐다.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조사결과보고서에 담긴 ‘7공수 특전여단 35대대 상황일지’(1981년 6월 제출)에는 다른 군 문서와 달리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옛 전남도청 앞 발포 상황이 나와있다.

기무사령부가 특조위에 제출한 이 문건 5월21일자를 살펴보면 ‘13:07 11여단지역 에이피씨(장갑차) 및 버스 질주. 11여단 1명 사망 도청 쪽으로 나는 총성 20여발’, ‘13:30 자위권 발동’, ‘13:50 지대장급 이상 실탄 20발… 도청 옥상 경계병 배치’ 등이 적시돼 있다.

당시 도청을 방호하던 7공수여단은 이날 오전 11시께 11공수여단과 교대한 상황으로, 11공수여단은 도청 앞 집단발포를 자행한 부대이다. 5·18 연구자들은 이 문건에 대해 당시 광주천 방면을 맡았던 7공수여단이 굳이 거짓 일지를 작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 봤을 때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상황일지에 등장하는 ‘13:30 자위권 발동’은 사실상 도청 앞 집단발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 군 관련 자료에서 자위권 발동이라고 적은 문서가 발견된 적은 없다.

특조위원들은 “이 문건에 담긴 내용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도청 앞 집단 발포 진실을 규명해 줄 것으로 보고 있다”며 “군의 공식적인 자료는 도청 앞 발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신군부는 현재까지 군이 사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특조위에 함께 제출된 미공개 ‘11공수여단 진압작전 수기’에는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상황이 담겨 있다. 11여단 62대대 이모 중령은 “운명의 13:00 정각…400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하게 됐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돌아보니 병력들은 횡대 무릎쏴 자세로 일제히 분수대 앞에 포진해 사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기록했다. 상황일지와 체험수기를 종합해 보면 계엄군은 물러나 있던 군중에게 집단 사격을 했고 사실상 사격 명령인 ‘자위권 발동’을 뒤늦게 한 것이다.

하지만 80위원회가 만들어지던 1985년을 기점으로 5·18 관련 군 문서 내용은 상당 부분 바뀐다. 511연구위가 1988년 작성해 제출한 ‘7공수 특전여단 35대대 상황일지’는 ‘폭도들이 산발적으로 도청을 향해 사격’이라고 내용이 바뀌었고 구체적인 시각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제목에는 ‘1차 작성 1985년’이라고 적어놓았다. 서주석 현 국방차관 등이 참여했던 511연구위는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총 88건의 군 자료를 수집, 정리했다.

511연구위는 체험수기도 군에 유리하도록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그밖에 특조위가 확인한 31사단 전투상보, 20사단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는 각 부대사와 비교했을 때 사실과 다른 내용이 기재되는 등 모두 위·변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조위 관계자는 “511연구위는 80위원회가 1차 왜곡한 군 자료를 꼼꼼히 재검토, 수정하며 5·18 진상규명을 어렵게 하고 있다”며 “80위원회 등은 5·18백서를 펴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서의 존재 유무가 확인되지 않아 왜곡 조직들의 활동 전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