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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탄생 100주년] <8> 용정의 학창시절
축구하며 문예지 만들던 중딩 동주, 시인을 꿈꾸다
2017년 08월 07일(월) 00:00
대성중학교 안에 있는 윤동주 교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시인의 생가 및 모교를 방문한 ‘시산맥’ 시인들.
용정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한이 응결된 곳이다. 일반인에게 용정은 ‘해란강’이 있는 도시로 인식돼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는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는 노랫말로 유명한 ‘선구자’에 등장한다.

원래 ‘선구자’의 원 제목은 ‘용정의 노래’였다고 한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작곡자 조두남이 이 노래말을 윤해영이란 함경도 말씨의 청년에게서 건네받았을 때의 원 제목은 ‘용정의 노래’였다”고 한다. 즉 “‘선구자’ 란 제목은 해방 후에 조두남이 개제(改題)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용정에서 나지막이 불러보는 선구자의 감흥은 예사롭지 않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이곳으로 이주해 농토를 개간했던 한인들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진다.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 갔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혼도 배어 있으리라.

어느 지역이든 고장을 기리는 노래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선구자’는 특정 지역을 넘어 우리 민족의 노래로 다가온다. 진중하면서도 장렬한 기운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마치 광주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주와 인권을 사랑하는 이들의 영원한 노래인 것처럼.

용정은 연변 자치구로 30여만 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약 50% 정도 되는 ‘한인들의 도시’다. 거리 곳곳에는 한글 간판이 걸려 있고 어느 곳에서든 우리말을 들을 수 있다. 서울 가리봉동의 ‘조선족 타운’ 느낌도 없지 않지만,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묘사된 구한말의 용정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시간의 간극 때문이리라.

윤동주가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소재한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2년이었다. 용정중학교는 원래는 대성, 은진, 동흥, 광명, 명신여고와 광명여고 등 6개교로 나눠져 있었지만 후일 통합됐다.

“광복 전 용정은 연변지역의 민족문화 교육의 발상지였으며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책원지였다. 수많은 항일투사들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광복 전 용정에 건립된 대성, 은진, 동흥, 광명, 명신여고와 광명여고 등 6소중학은 바로 민족의 수난기에 창립된 역사가 유구하고 항일의 우량한 전통을 갖고 있는 학교들이었다. 역사의 변천과 함께 이 6소중학은 합병되어 길림성용정중학으로 되었다.”

역사관 안내문에 적힌 내용이다. 당시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는 송몽규, 문익환도 함께 입학했다. 은진중학교는 대강당을 갖춘 규모가 큰 신식 근대교육기관이었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집과 농토를 소작인에게 맡기고 명동촌을 나온 것이다.

윤동주의 중학시절은 비교적 활동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축구 선수로도 활동했고 송몽규와 함께 문예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동생 윤일주는 형을 이렇게 기억한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나라사랑23집』, 외솔회)

가부장적 의식이 지배하던 문화 속에서 윤동주의 남다른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섬세하고 여성적인 기질을 지닌 문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내면에는 섬세한 미의식과 적극적 성향이라는 상반된 특질이 깃들어 있었다(아름다운 시를 쓰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이를 방중한다).

중학교에 입학 후 윤동주는 본격적인 시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초한대’, ‘내일은 없다’, ‘삶과 죽음’ 등의 시를 쓸 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는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한다. 친구였던 문익환은 한 학기 전에 전학온 상태였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게재하면서 창작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숭실중학교를 1년여 다닐 무렵 학교가 폐교당하기에 이른다.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일제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윤동주는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편입한다.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문학잡지에 글을 발표한다. 권영민이 엮은 ‘윤동주 전집’에는 “북간도 연길에서 발해되던 ‘카톨릭 소년’이라는 잡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를 비롯해서 ‘빗자루’ ‘거짓부리’ 등의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가 문학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작품 세계가 여물어져 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용정중학교 안에는 대성중학교가 복원돼 있다. 그리고 대성중학교 안에는 윤동주 교실이 재현돼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6개교가 용정중학교로 통합됐는데, 왜 대성중학교만 복원돼 있는 것일까. 현지 안내원은 “일제시대 우리민족만이 다닐 수 있는 민족학교인데다 우리 말을 썼던 학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성중학교 옆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설역사전시관이 있다.

학교 앞에 ‘별의 시인 윤동주’(星的詩人 尹東柱, The Poet of Star Yoon Dong Zhu)라고 명명된 석상이 보인다. 다소 이국적으로 보이는 그의 흉상은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듯 우수에 차 있다. 옆에 있는 윤동주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서시’가 새겨져 있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석상 위로 못 다 이룬 시에 대한 꿈이 어른거린다. 어디선가 낭낭한 음성으로 그가 시를 읊조리며 나타날 것만 같다.

‘윤동주 교실’은 오지의 산골학교 분교를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아련한 추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적잖이 씁쓸하다. 명징하면서도 또렷한 역사의 실재이자 실존의 공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의 흉상과 칠판, 풍금, 사진, 걸상 등은 그대로인데 시인은 이곳에 없다. 수업을 듣는 사진과 장작 난로 옆에서 사은회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에서나마 어렴풋이 그려볼 뿐이다. 그의 시 정신만이 오롯이 남아 오늘의 무정한 시간을 말해줄 뿐이다.

/중국 용정=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