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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 닮으려 지은 도시 ‘러시아의 정신’으로
2015년 10월 01일(목) 00:00
표트르 대제가 늪지를 메워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을 가운데 두고 왼쪽엔 뾰족한 첨탑의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가 있고, 오른쪽엔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심장’이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정신’으로 불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경제 중심지였고,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를 탄생시킨 문화의 도시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모던 등 온갖 양식의 건물들로 가득해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서유럽을 향한 표트르의 야망=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젊다. 아니 어리다. 나이가 고작 300년 남짓이다. 1703년 첫 삽을 떴으니 말이다. 이 도시의 탄생 스토리는 이렇다.

제정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대제가 왕위를 계승한 지 15년이 되는 해, 그는 무려 18개월간 서유럽을 순방하며 유럽의 선진문화를 체험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배 만드는 법을 배웠다. 서유럽 여러 도시 중 그를 사로잡은 곳은 암스테르담이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고 열악한 환경을 거꾸로 이용해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 도시다.

1703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만과 네바강이 만나는 자리를 콕 집어 “자, 여기에 유럽으로 열린 창을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세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그는 모스크바의 화려한 궁전을 뒤로 한 채 늪지 위에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살며 공사현장을 지휘했다. 설계는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는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에게 맡겼다. 늪지는 하루가 다르게 바로크 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의 멋진 건물들로 채워졌고, 또 하나의 유럽이 생성됐다. 도시의 화려함 이면엔 1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목숨이 희생됐다.

도시의 틀이 갖춰지자 표트르 대제는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왕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의 지위를 누리면서, 러시아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를 탄생시킨 문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다 했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첫 죄수는 아들=영화 ‘사도’가 인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얘기하면서 왠 뜬끔없는 사도냐고?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 때문이다.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 유역에 구축했다. 하지만 요새가 만들어진 뒤 정작 스웨덴 군대는 단 한 번도 쳐들어온 적이 없어 요새는 정치범수용소로 사용됐다.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바쿠닌, 트로츠키 등이 이 곳을 거쳐가면서 이 요새는 ‘러시아의 바스티유’라는 별명이 붙었다.

감옥이었던 요새의 첫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였다. 죄명은 반역죄, 아버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는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황위에 올랐다. 외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군인이었던 표트르는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스웨덴을 격파했고 폴란드를 영유했다. 반면 황태자는 유약했다. 전쟁보단 평화를 추구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구귀족들은 그를 부추겼다. 아버지는 자주 아들을 질책했다. 총신 멘시코프 대공을 감시자로 세우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아들은 점점 아버지가 두려워 피했다. 비밀리에 탈출을 감행했다.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 러시아로 끌려왔다. 표트르는 황태자를 포기했다. 그러나 새 후계자는 아직 두살배기였다. 조용히 살려 해도 근친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황제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가뒀다.’ -천정근 목사의 ‘러시아의 사도세자’ 중에서

마치 조선의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인 듯하다. 또 하나 표트르의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수원화성은 새 시대를 향한 야망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러시아의 베르사이유궁전=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여름궁전은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전을 닮았다. 궁전은 표트르 대제를 위한 여름궁전(페테르고프)과 그의 왕비 예카테리나를 위한 여름궁전(차르스코예 셀로)으로 나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핀란드만이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페테르고프는 ‘분수궁전’으로도 불린다. 800만㎡의 광대한 면적에 7계단 64개 분수가 향연을 펼친다. 삼손분수, 이브분수, 피라미드분수, 나무분수, 체스분수 등 나름의 상징성을 지녔다. 이들 가운데서도 130여개의 물줄기를 내뿜는 대폭포분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춰 분수궁전의 ‘진주’로 꼽힌다. 이 모든 분수가 지하수에서 나오는 압력으로 작동한다는 과학적 사실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성 이삭 대성당과 피의 사원=성 이삭 성당은 불모의 늪에 빼어난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표트르 대제의 생일인 5월 30일이 성 이삭의 날인 까닭이다. 1818년 몽페란드가 설계하고 40년만에 완성했다.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띠는 황금빛 돔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돔이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무려 50만명이라고 한다. 내부는 1만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탄성이 쏟아진다. 고개를 들어 벽이며 천장까지 샅샅이 훑어보다보면 다문 입은 쉽사리 닫히지 않는다.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러시아 작가들의 19세기 작품들이 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고, 특히 60점이 넘는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과 닮은꼴의 성당이 있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 일명 ‘피의 사원’이다. 바로크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들이 가득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복고 스타일로 완벽하게 구현됐다. 도시 어디에서 봐도 81m로 솟은 탑과 양파모양의 알록달록한 꾸뽈에 저절로 마음이 끌린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의지당의 폭탄테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어 황제에 오른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지었고 그게 ‘피의 사원’이다. 내부에는 지금도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흘렸던 자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남쪽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이 모델이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