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고 말리고 찧고…천번의 손길과 정성 천년의 전통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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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고 말리고 찧고…천번의 손길과 정성 천년의 전통 지킨다
<7>코타키나발루- '바나나 의복' 맥 잇기
2015년 02월 16일(월) 00:00
달리마 씨는 바나나 나무 줄기에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술자다. 두순틴달족은 과거 지천에 널린 바나나 나무 줄기를 재료로 의복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기술을 가진 이가 거의 없어 사실상 맥이 끊긴 상태다. 그녀는 자신이 멈추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전통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코타키나발루에서 차로 네 시간을 달리면 코타 블루드 지역에 닿는다. 소수민족인 두순틴달족이 사는 코타 블루드 지역은 크고 푸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바나나 나무가 사방에 펼쳐져 있다. 차량 한대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마한 자갈길 도로를 차로 한참 달리다 보면 초목 사이로 덩그러니 서 있는 집 한 채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거진 바나나 나무 숲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를 헤쳐가며 들어간 집에는 달리마(Dalima 여·56)씨와 가족들이 직조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한낮의 무더운 열기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양철지붕을 뚫을 듯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물 짜는 모습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 어디서나 보이는 모습들이다. 무심코 지나치려는 방문객에게 가이드가 던진 설명은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오직 한 사람,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다’라는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뜨인 이들을 향해 가이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달리마 씨가 만들고 있는 직물은 언뜻 보기에 다른 직물과 다르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아야 직물 소재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목화에서 얻은 실로 직물을 만든다. 그녀가 만든 직물은 이와 달리 바나나 나무 줄기에서 얻은 소재로 실을 얻는다.

바나나 나무에서 얻은 실은 삼베와 비슷한 누런 색이고 모시옷처럼 가슬가슬한 느낌이다. 언뜻 보면 면과 유사한 바나나 나무 줄기 실은 생산과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4개월 정도 자라 2m 높이로 자란 바나나 나무 줄기 아랫부분을 칼로 벤다. 이후 잎사귀와 바나나가 달려있는 윗부분을 베어낸다. 이렇게 해서 1.5m길이 바나나 나무 줄기를 얻는다. 노랗게 익기 전 초록색인 바나나는 줄기 역시 짙은 녹색을 띤다. 이것을 칼로 한꺼풀씩 벗겨내면 짙은 보라색 알맹이가 나타난다. 여러 층이 겹쳐져 있는 바나나 나무 줄기를 20여 개 가닥으로 찢는다. 이를 반복하면 폭 3cm, 길이 1m의 얇고 긴 바나나 나무 줄기를 얻을 수 있다. 직물을 만들 수 있는 실의 형태를 보이는 것은 이 다음 과정에서부터다.

균일한 크기로 만든 바나나 나무 줄기를 칼로 눌러 수분을 제거한다. 지면과 직각으로 세운 칼을 고정한 후 줄기를 눌러주면서 통과시킨다. 열 차례가량 작업을 반복하면 드디어 얇고 기다란 실의 형태가 드러난다. 이렇게 얻어진 바나나 나무 줄기 실은 거미줄처럼 가늘지만 억새처럼 까칠했다. 이를 일주일 정도 그늘에 건조한 후 나무로 만든 절구통에 넣고 두드려 부드럽게 해준다. 30여 분 절구질에 누렇고 거칠던 실은 이내 보드라워졌다.

남성과 여성은 바나나 나무 줄기 실을 만들 때 서로 역할을 분담한다. 남성은 나무 줄기를 베어 절구질로 가늘고 고운 실을 만들기까지 역할을 맡는다. 그늘에서 일주일 간 말린 실로 직물을 만드는 것부터는 여성이 나선다. 각각의 실 가닥을 연결해 기다란 실 뭉치를 만들고 이를 가로, 세로로 엮어 넓은 직물을 만들기까지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렇게 만든 직물은 염색을 거쳐 의복의 재료로 거듭난다. 이렇게 얻은 직물은 ‘따훔’이란 풀을 물에 넣고 끓여서 염료를 만든 후 이틀 정도 담근다. 직물에 색이 충분히 염색됐을 때 꺼내 다시 그늘에 말린다. 두순틴달 족은 전통적으로 푸른빛 인디고 색과 검은색 직물만을 생산한다.

수 천년 간 이어진 바나나 나무 줄기 직물은 두순틴달족 전통이자 자랑이었다. 이렇게 만든 옷은 면으로 만든 것처럼 부드럽고 질겨 오랫동안 보관해도 형태가 변하지 않았다. 바나나 나무 줄기로 만든 직물은 이제 더 이상 만들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아서 무척 희귀하다. 그래서 의복보다는 박물관을 찾아야 볼 수 있다. 달리마 씨가 만들고 있는 직물 역시 대부분 박물관 보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마지막 기술 보유자인 달리마 씨는 최고의 직물로 손꼽히는 바나나 나무 줄기 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을 1940년대라고 설명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할머니, 어머니가 바나나 나무 줄기 실로 직물을 만드는 게 아주 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중국과 인도에서 값싼 면이 들어오면서 점차 전통 직물이 사라졌어요. 나무에서 실을 얻어 옷을 완성하기까지 1년이 걸릴 정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아무나 입을 수 없는 특별한 의복이었는데 요즘은 그 맥이 완전히 끊긴 상태입니다.”

결혼 후 자녀를 키우느라 바나나 나무 줄기 직물 생산을 중단했던 그녀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2012년부터 전통방식으로 의복을 만들고 있다. 자신이 중단하면 더 이상 바나나 나무 줄기 옷을 만드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달리마 씨는 기술을 알리기 위해 적극적이다. 딸과 며느리와 함께 작업을 하는 이유도 기술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기술자인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전통은 한 사람이라도 지키고 계승하는 게 중요해요.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건 죽어버린 것이죠. 제가 살아있는 한 바나나 나무 줄기 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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