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물길 덮어 도로·주거지로 … 개발에 묻힌 ‘물의 도시’
  전체메뉴
1930년대 물길 덮어 도로·주거지로 … 개발에 묻힌 ‘물의 도시’
5. 사라져버린 광주의 물길
2012년 05월 16일(수) 00:00
1967년 경양방죽 2차 매립을 위해 허물어버린 태봉산과 정상 부근에 있었던 석실
광주 구도심의 주요 도로는 물길이었다. 광주읍성을 중심으로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었고 광주천, 동계천, 서방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났다. 구도심에서 북쪽에 있던 경양방죽과 이들 물길은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물길이 경양방죽에 들어가고 또 한편으로는 광주천 등과 만나면서 주변 농경지를 비옥하게 했고, 그것은 곧 광주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시장이 광주천 주변에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즉 도시화는 이들 물길들을 덮어 도로로, 경양방죽을 매립해 주거지로 만드는 ‘옛 것 지우기’이기도 했다. 도시화는 곧 산업시설 유치, 인구 증가, 지하수 오염 등으로 이어졌고, 도로·하수·주거지 등이 시급했던 일제는 토지소유주와의 마찰 없이 손쉽게 토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제가 경양방죽을 매립하는데 농민만이 아니라 지역 내 지식인들까지 반발하고 나선 것은 이 ‘거대 연못’이 단순히 물을 가둬놓고 방류하는 저수지의 기능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물이었고 ‘물의 도시’ 광주를 구성하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도 이 아름다운 경양방죽의 풍경에 감탄, 광주에서는 유일하게 풍치지구로 지정하기도 했다.

경양방죽은 광주고와 계림초등학교 및 옛 광주상고의 정문 앞에서 광주역 쪽을 향해 서남방으로 벌어진 선형체의 저수지였다. 김방이 1440년(세종 22년) 광주목사로 부임해 그 다음해 경양방죽 공사에 들어가 3년 만인 1443년에 준공했다고 전해지는 관개용 인공호수다. 당시 저수지의 면적은 4만6465평, 제방의 연장과 높이는 각각 1000m, 10m였으며, 그 주변에 대규모 숲이 조성돼 있었다.

경양방죽의 매립이 첫 거론된 것은 1936년의 일이다. 이 시점은 광주가 면에서 읍으로, 다시 부로 급성장하는 시점이었고 자연히 일본인의 광주 진출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다.

그 다음해인 1937년 6월 어느날 유일하게 한국인 부읍장을 지낸 박규일이 당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지금의 광주시 동구 황금동에서 서석병원을 운영하던 최영욱 박사에게 “일본인 도지사와 광주시장이 의논해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해 온 경양방죽에 일본인 주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신무 1600년 기념사업’이라는 명분으로 1940년 이내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일제가 과거 경양방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허물어 그 전부를 메우기로 설계에 착수한 시점이다.

최 박사가 그의 집 안의 맏형인 최흥종 목사에게 이를 전하고, 몇몇 지역유지들은 바로 뜻을 모아 경양방죽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대 진정서에서 이들은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광주 민생과 직결되는 농업 경영의 원천인 경양방죽은 광주천 범람과 폭우 시 주변 수량을 조절하고 대규모 화재를 예방하는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며 “매립은 대도시 광주건설의 현명한 시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또 “주택지 조성은 담양가도, 화순가도, 송정가도, 장성가도 등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한 민족 한 지방의 역사적인 유산을 무자비하게 말살하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이기 때문에 풍치지구로 미화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반대운동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최초 전체 매립 방침에서 설계 변경을 통해 3분의 1의 면적이 남게 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1936년 11월4일자 전라남도 도보는 광주부가 시가지 조성을 목적으로 당시 소화정 505번지의 공유수면 4만465.5평을 매립하도록 허가했으며, 전남도는 1940년 2월10일 매립 면적을 4만5531평으로 변경해 매립공사의 준공을 인가한 뒤 4월13일 나머지인 소화정 505-328번지의 1만8832평에 대해 광주부에게 유원지를 목적으로 10년간 공유수면의 점용을 허가했다.

이로써 경양방죽의 면적은 1만6100여 평으로 축소됐고, 해방 이후 골프 및 보트장 등 오락시설이 설치되기도 했다.

광주부는 1943년 특별회계를 구성, 1944년부터 1947년까지 4년간 모두 67만원을 들여 광장, 보트장 및 녹지, 아동 유희장 등을 조성할 방침까지 수립했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간신히 명목만을 유지했던 경양방죽은 1967년 완전 매립됐다. 이미 경양방죽 인근이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논밭이 사라진데다, 도심과 가깝다는 점에서 개발 잠재력도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2차 매립도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지역 내 여론에 부딪혔지만 일제강점기 당시보다는 못했다. 경양방죽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의 오폐수가 유입되고, 그나마 이를 정화했던 물길이 사라지면서 악취가 진동해 매립하자는 시민 여론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매립에 쓸 토사가 없었다. 여기서 매립업체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북구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태봉산을 헐자는 것이었다. 이 안은 받아들여지고 결국 이는 경양방죽과 태봉산을 동시에 사라지게 했다. 태봉산과 관련 국가기록원의 자료는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석초등학교)의 학교림으로 산 정상에 1627년 제작된 석비가 있었으며, 1928년 여름 당시 서방면 부인단체가 조선 왕족의 태의(태반)을 묻은 석실을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이 경양방죽의 2차 매립은 광주 전체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시 동구 남동 구시청 사거리에 있었던 시청이 매립지로 이전하면서 주변 개발이 촉진됐고, 태봉산이 없어지면서 인근의 도로 구조가 결정됐다.

광주천의 명물이었던 석서정과 조탄보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석서정은 여지승람(1481년)과 광주읍지(1879년)에도 소개돼 있다. 광주천에 두 물줄기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 즉 지금의 동구 금동 147번지 인근에 석성을 쌓아 물줄기의 힘을 완화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석서정이다. 석서란 돌로 만든 물소라는 의미이며, 그 맞은편에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양파정이 있다. 조탄보 역시 광주천에 보를 쌓아 재해를 막는 ‘장치’였고 옛 적십자병원 앞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현석기자 chadol@kwangju.co.kr



▲도움말 주신 분

노경수 광주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이봉수 동강대 건축과 교수, 윤희철 국가기록원 직원

▲이 기사는 국가기록원·광주시청·전라남도청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