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울리는 ‘김주리 소리’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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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울리는 ‘김주리 소리’ 만들고 싶어요”
8세때 ‘수궁가’ 완창 으로 소녀명창 화제
도립국악단 입단 또다른 소리인생 시작
“스물다섯 이전 판소리 5바탕 완창 무대”
(12) 소리꾼 김주리
2012년 04월 02일(월) 00:00
소리꾼 김주리(20)양에게는 ‘소녀 명창’ ‘꼬마 명창’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8살이던 지난 2000년, 동편제 ‘수궁가’를 완창했고, 만 10살이 되던 2003년에는 ‘수궁가’와 ‘심청가’를 9시간 20분 동안 연창, 기네스북에 기록을 올리며 화제를 모았었기 때문이다.

마냥 어린 소녀일 것만 같은 주리양이 어엿한 숙녀가 됐다. 전남도립국악단원 공채에 최연소로 합격, 지난달 말부터 도립국악단에서 새로운 소리 인생을 시작하는 주리양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제가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아직도 배울 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선생님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우고 혼자 공부를 해왔어요. 국악단에서 선배, 동료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가장 배우고 싶은 건 판소리의 극적인 요소들이예요. 또 판소리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배우고 싶어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열심히 해 나갈겁니다.”

주리양이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만 4살 때였다.

“그 때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선생님이 하는 소리를 따라하면 아주 재미있었어요.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 막 기분도 좋구요.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장기자랑 할 때마다 판소리를 했더니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져주고 해서 어린 마음에 우쭐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라 힘들었을 거라고들 하시는데 아빠랑 같이 하니까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알린 주리양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 성공개최 기원 전국 순회 완창발표회를 가졌고 2003년에는 한국이민100주년 기념 공연단 일행으로 미국 필라델피아를 방문, ‘심청가’를 공연했다.

또 국립창극단의 ‘춘향이와 몽룡이의 사랑이야기’에는 오디션을 거쳐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고 노무현 대통령 취임·퇴임 공연 등에 참여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소리’가 마냥 좋았던 소녀에게 첫번째 시련이 찾아온 건 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면서였다. 누구보다 ‘소리’만은 자신 있었던 주리양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악 관련 학교인 국립 국악고등학교를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국악고 입학에는 판소리 실력 뿐 아니라, 시창과 청음, 내신성적과 수학점수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첫번째 좌절이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판소리를 배우고 난 후 처음으로 한달간 연습을 멈췄다. 늘 든든한 후원자인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소리 선생님’을 찾아 다시 낙향하기로 했다.

전주예술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냈고, 전주에 머물고 있던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오정숙 선생에게 동초체 판소리를 배웠다.

“주말 레슨을 받았는데 토요일 저녁에 가르쳐준 내용을 다음날 아침 일어나 점검을 받아야했어요. 선생님은 무엇보다 연습을 정말 중요시 하신 분이셨어요. 레슨을 받을 때면 선생님 댁 2층에 머물렀는데, 거의 잠을 못잤죠. 아침에 선생님께 검사받을 일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웃음). 당시 제가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는데 많이 예뻐해주시고 많은 걸 가르쳐주셨죠.”

하지만 오선생에게 배우는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건강했던 스승이 갑자기 타계한 것. 소리를 배운 지 1년만의 일이었다. 큰 충격를 받은 주리양에게 또 다른 선택의 시간이 왔다. 주리양은 과감하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레이사아 헬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어릴적 꿈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떼는 셈이었다.

“소리를 시작하고 나서 뉴욕, 필라델피아 등 외국 공연을 많이 다녔어요. 그 때마다 느낀 게 우리 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었죠. 중국, 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많았는데 학교 다니면서 프리젠테이션 할 때마다 판소리를 들려주면 모두 감동하더라구요. 뭐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음악’이라는 공통된 사실에 다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당시 말레이시아에도 한류 바람이 대단했거든요. 친구들이 아이돌 가수 노래만 듣다가 이게 우리 전통음악이라고 하니 무지 신기해 하고 그러더라구요.”

어린 나이에 소리를 시작한 주리양에게 다양한 소리들을 가르쳐준 선생님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대체로 소리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무뚝뚝하신 편이세요. 잘 한다는 칭찬 대신 ‘음, 좀 들을만 하네.’ 뭐 이 정도가 칭찬이죠.(웃음). 여러 선생님들에게 배웠는데 목소리 음색이 독특한 점이 큰 장점이라고들 하셔요. 남성같은 기운찬 면도 있구요. 제가 몸이 좀 뻣뻣한 편이라, 판소리의 매력을 높이는 발림 같은게 약한 편인데 이건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또래 친구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주리양은 자신의 길에 대해 한번도 후회를 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소리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고, 그런 생활들이 이제 이미 몸에 다 적응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주리양은 하루에 4시간씩 소리 연습을 거르지 않는 연습벌레다. 연습이 아주 잘 될 때면 자기도 모르는 자기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 때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판소리 다섯 바탕중 세바탕의 공부를 마친 주리양은 스물 다섯이 되기 전에 다섯바탕 완창 무대를 마칠 생각이다. 또 4월 열리는 남원 춘향제를 시작으로 판소리 경연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열아홉 주리양이 가슴에 새긴 아주 큰 꿈이 있다. 대중이 공감하는 자신만의 소리 유파, ‘김주리류(流)’를 만드는 것이다. 동편제, 강산제, 보성소리 등 다양한 유파의 소리를 배운 주리양은 단순한 ‘짜깁기’가 아닌, 다양한 소리의 특장점을 완벽하게 재해석한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지 주리양도 잘 안다. 어쩌면 소리꾼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꿈으로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행여 ‘불가능할 꿈’일지라도 그걸 품고 달려가는 게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줄 알기에 그녀는 오늘도 가슴 속에서 ‘소리’를 끌어낸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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