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오일 작가, 아픈 세상 보듬고 치열하게 살았던 장두석 선생 삶 조명
‘장두석 평전’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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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통이 없이는 이웃에게 줄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내 고통이 수반될 때 이웃에게 도움이 된다.”
해관(海觀) 장두석(1938~2015) 선생의 평소 지론이었다. 일평생 그는 아픈 세상을 보듬고 치열하게 농민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화순에서 출생한 그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독재 시대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소년 시절 간질환과 폐수종을 알았지만 고향 옹성산서 단식과 생채식으로 병이 완치되는 체험을 했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 그를 자연과 생활에 토대를 둔 민족생활의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해관 장두석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발간됐다.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안오일 작가가 펴낸 ‘장두석 평전’은 아픈 사람들과 아픈 세상을 보듬고 치열하게 살았던 장두석 선생의 삶을 조명한다. ‘겨레의 몸과 마음 살리며 통일춤 덩실덩실’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지난한 시대를 옹골지게 살아낸 장두석의 일평생을 아우른다.
화순 이서 소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그는 삶 속에서 배움을 실천했다. 여순사건으로 1949년 집안 형님을 비롯한 마을 청년 7명이 총살을 당했고 6·25전쟁 중에는 집안의 형님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저수지에 수장당했다. 당시 사건은 소년 장두석에게 큰 슬픔을 넘어 ‘왜?’라는 의문으로 다가왔고, 문제의 시작이 분단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그의 삶은 평생의 동지이며 친구, 스승이었던 박현채와의 만남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앞으로 무등산을 지키는 두목이 돼라”는 말은 그에게 의무이자 희망이 됐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야학과 가톨릭농민회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한다. 80년 5·18때는 ‘죽음의 행진’ 참여 등으로 수배돼 군사법정에서 12년 형을 선고받고 사면·석방되기도 했다.
장두석은 전통문화를 지키고 고향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뿌리 없는 생명은 없다’는 사상을 견지하며 역사적 소명이 있는 곳, 민중의 아픔이 잇는 곳을 찾았다.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고무신을 신었던 그는 역사 속 ‘시대의 어른’으로 남았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해관(海觀) 장두석(1938~2015) 선생의 평소 지론이었다. 일평생 그는 아픈 세상을 보듬고 치열하게 농민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화순에서 출생한 그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독재 시대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소년 시절 간질환과 폐수종을 알았지만 고향 옹성산서 단식과 생채식으로 병이 완치되는 체험을 했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 그를 자연과 생활에 토대를 둔 민족생활의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안오일 작가가 펴낸 ‘장두석 평전’은 아픈 사람들과 아픈 세상을 보듬고 치열하게 살았던 장두석 선생의 삶을 조명한다. ‘겨레의 몸과 마음 살리며 통일춤 덩실덩실’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지난한 시대를 옹골지게 살아낸 장두석의 일평생을 아우른다.
이후 그의 삶은 평생의 동지이며 친구, 스승이었던 박현채와의 만남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앞으로 무등산을 지키는 두목이 돼라”는 말은 그에게 의무이자 희망이 됐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야학과 가톨릭농민회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한다. 80년 5·18때는 ‘죽음의 행진’ 참여 등으로 수배돼 군사법정에서 12년 형을 선고받고 사면·석방되기도 했다.
장두석은 전통문화를 지키고 고향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뿌리 없는 생명은 없다’는 사상을 견지하며 역사적 소명이 있는 곳, 민중의 아픔이 잇는 곳을 찾았다.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고무신을 신었던 그는 역사 속 ‘시대의 어른’으로 남았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