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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3년간 패배를 몰랐던 남일 심수택
“가는 곳마다 적뿐이라” 강진 오치동전투 시작으로 항일투쟁
조선 말 의정부 도사 심선봉 셋째 아들 함평서 태어나
7세에 사서삼경 독파, 학문 뛰어나고 국내외 정세에 관심
1962년 건국공로훈장…광주공원에 순절비, 함평에 기념관
2021년 12월 30일(목) 21:30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은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43-2에 있다. 이 기념관은 수택의 손자 고 심만섭씨가 부지를 기증하고, 도비와 군비로 건축했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광주공원에 있는 심남일 순절비. 심남일의 구국충정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1965년 광주공원에 세워졌다. 그의 후손들이 어려운 가정형편에 가까스로 그 비용을 마련했다.
“심남일이 용마를 타고 산 위에 솟아나면 현수풍운(鉉秀風雲)이 조화하여 공중으로 날아간다.” 1908년 이후 해남, 강진, 영암 등 전남 남부에서 불린 동요다. 의병장 중 가장 큰 전과를 남긴 심수택의 자는 덕홍, 호는 남일이다. 1871년 2월 10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에서 심선봉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일은 1907년 거병하면서 지은 호다. 7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는 등 학문에 뜻을 뒀으며, 국내외 정세에도 관심이 높았다. 아버지 심선봉이 의정부도사로 재직하면서 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수택에게 전하기도 했다. 20세에 이르러 함평향교에 나갔으며, 그곳에서 남도의병의 쌍벽이라고 불리는 김준과 신승준 등 당대 선비들과 만났다. 이들과 향교 명륜당에 모여 국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의 밀조가 팔도에 내려가자 최익현, 기삼연, 고광순 등도 차례로 일어났다. 군자금이 없어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던 수택은 김준과 논의한 끝에 기삼연 부대에 참여하러 가던 도중 함평에서 한 살 위로 친한 신동욱을 만나 군자금 300냥을 지원받았다. 무기와 탄약을 산 수택은 1907년 음력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거병했는데, 의병들을 향해 “초야에 서생이 갑옷을 입고 말 달려 남으로 건너가네, 만약에 왜놈들을 못 없앤다면 이 몸이 백사장에 죽고 말련다.”는 시를 읊었다. 이 때부터 호를 남일(남쪽이 하나가 돼 왜적을 평정한다는 의미)로 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호응을 권유했다.

평소 뜻을 같이 하던 강무경과 토적 계획을 세운 수택은 30여 명의 정예병에게 군사교육을 시킨 뒤 1908년 2월 나주 남평에 나가 6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기삼연이 광주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에 수택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각 고을 수령 및 향교에 통보했다. 일본 군경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일본군 앞잡이에게도 경고장을 날렸다. 전열을 정비하면서 대장에 오른 수택은 선봉장에 강무경, 임만선, 장인보, 중군장에 안체재, 박사화, 후군장에 노병우, 나성화, 최우평, 김성재, 도통장에 김도숙, 통장에 유치선, 공진숙, 군량장에 이세창, 호군장에 강달주, 정관오, 기군장에 장문연, 이덕삼, 서기 겸 겸사에 염원숙, 도포에 장경선, 김판옥, 선도명, 도집사에 최유승, 모사에 권택, 정영태 등을 임명했다. 수택은 이 쟁쟁한 의병들과 3년간의 전투에서 전승을 거뒀다.

1908년 3월 7일 나주 남평을 출발해 강진 오치동(강진읍 서산리)에 이르러 군문을 만들어 보초를 세우고 잔치를 벌였다. 의병들에게 굳은 신념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그는 “천지에 가는 곳마다 적뿐이라, 맹세하고 장단에 오르니 오직 믿는 것은 군사밖에 없다. 여러 군사들은 명령을 준수하지 않으면 마땅히 형벌이 있을 것이다”는 전령을 내렸다. 10명으로 소부대를 만들고 통장을 뒀으며, 폭력을 행사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말 것, 전답 보호, 식사 시간 엄수, 발포 명령 이행 등을 명령했다. 1908년 3월 8일 날이 밝기 전 강진에 주둔하기 위해 이동하던 일본군 수백 명이 수택의 의병을 공격해와 새벽 6시부터 14시간의 교전 끝에 지형을 이용해 4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밤 10시경에 이르면서 일본군이 철수하자 두고 간 총, 칼 등을 거둬들인 뒤 장흥으로 이동했다.

1907년 11월 1일 거병해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심수택의 동상.
수택은 일본군이 자신을 추적할 것을 예상하고, 장흥 관암 양쪽에 기군장 장문연, 이덕삼 등을 매복시켜뒀다. 곧바로 10여 명의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매복한 의병들이 일제 사격에 나서 7명을 사살했다. 이에 주민들이 감격해 소 한 마리를 의병들에게 내놓기도 했다. 수택은 모사 권택에게 각 고을 면장, 이장 등에게 왜적의 침입은 내부의 틈이 있기 때문이라며 민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게 했다.

수택은 소극적인 수비가 아니라 능동적인 기습을 감행하기로 작전 계획을 변경해 각 군에 설치된 분파소를 목표로 삼았다. 일제가 호남에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1908년 6월 19일 수택의 의병들은 남평 죽곡에 매복한 뒤 7~8명을 일본군이 주둔한 분파소에 보내 유인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전투 태세를 갖춘 일본군 60여 명이 달려들자 매복한 의병들이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7~8명의 사상자가 나자 후퇴했고 나중에 살펴보니 6명을 사살했으며, 2문의 포를 노획했다. 남평 죽곡 장담원에서 일전을 치른 수택은 능주 노구두에 후군장 노병우를 보내 일본군 5명을 죽이고 말 2필과 무기를 얻었다. 1908년 7월 30일 영암 월출산에 진을 쳤다. 이 때 영산포에 도착한 고도히라야마가 이끄는 20여명의 일본군 기병이 영암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 전술을 폈다. 매복한 의병이 일제 사격에 나서자 일본 기병 20여 명은 당황했고, 앞서 일본 기병을 피해 달아나던 후군 노병우의 부대가 말머리를 돌려 반격하면서 고도히라야마 등 10여 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망한 일본군 장교 고도히라야마가 이끄는 기병은 6개 전투에서 승리한 바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후 사촌을 나와 당산촌으로 진을 옮긴 수택은 1908년 8월 1일 나주·영암 경계까지 행군하며 나주 반치에 이르렀다. 이 때 일본군 40여 명이 쫓아오자 수택은 중군장 안체재·박사화, 후군장 최우평·김성재를 매복시켜 기습했다. 의병 중에서는 조기진이 순직했으며, 일본군 20여 명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 다시 9월 20일 나주에서 장흥 신풍으로 온 수택은 서기 염원식이 일본군 30여 명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보고를 해오자 강현수에게 100여 명으로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총 30여 정과 칼 5자루를 얻었다. 이 때 수택과 선봉장인 강무경이 부상을 당해 영암 분토동의 한 민가에 몸져누웠다.

잠시 건강을 회복하고 10월 9일 해남으로 이동했다. 수택은 전남 곳곳을 돌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해남성의 10여리 밖에 진을 친 수택은 밀정들로 인해 기습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밤 10시께 선봉장과 각 군장을 불러 공격을 명령했다. 성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헌병대에게 집중 포격하면서 성내리 광장을 시살했다. 성내리 광장(옛 동헌 터)에는 큰 나무들이 있어 이를 이용해 무려 100여 명의 일본 헌병을 사살했다. 아군의 피해도 커 공격 직후 대둔사로 퇴각했다. 일본 경찰의 ‘전남폭도사’에서도 “괴수 심남일이 이끄는 200여 명이 해남 헌병분대을 기습해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싸웠다. 헌병 60여 명이 폭도들에 의해 순직했다. 모리 상등병이 이웃부대에 알리려 했으나 폭도는 이미 전신줄을 단절해 연락이 불가능했다. 폭도 10명을 죽였다.”고 적었다.

의병은 10월 28일 나주 노안으로 출진해 능주 석정에 도착, 일본군 진지 공략에 나섰으나 미리 이를 알고 있던 일본군이 선수를 쳤다. 10여 차례의 공방전 끝에 후군장 최우평이 순절하고, 20여 명이 다쳤으며, 일본군도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퇴각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움직임 없이 쉬는 시간을 가진 뒤 수택은 1909년 3월 8일 강현수, 박봉주, 박채홍 등과 나주 월정리에 진을 구축했다.

광주 방면으로 정탐을 나간 의병부대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수택은 본진을 장암으로 옮긴 뒤 박봉주·박채홍을 철천, 박민홍은 선동에 머무르게 하는 등 약 700m 간격으로 학익진을 폈다. 선동으로 들어간 일본군이 영산포로 퇴각하자 전면전을 각오한 수택은 영산포 본진을 정탐하면서 각 진의 책임자에게 진을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 이어 장성·영광 방면의 전해산, 이대국, 오인수, 보성 답사리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 등에 공동작전을 제의했다. 이에 전해산, 안규홍 등이 나주로 달려와 작전을 짰지만 현지 사정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참모의 조언을 들으며 각오를 다진 수택은 1부대를 동쪽 대치, 2부대를 대항봉, 3부대를 월임치, 4부대를 덕룡산 상봉, 5부대를 병암치 등에 각각 매복시켜 능주, 광주·나주 남평, 영암 등의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철저한 전략은 적중해 능주, 광주, 영암 등에서 접근하던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했으며, 아군은 8명이 전사했다. 이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박여홍, 박태환, 박기춘 등이 크게 활약했다.

남평 거성동에서 일전을 치른 수택은 모사 권택의 권유로 능주 풍치로 군사를 이동시켜 매복했다. 자신들을 뒤쫓는 일본군을 기다린 것이다. 매복한 의병들이 뒤쪽에서 공격하자 400여 명의 일본군 가운데 40여 명이 나가떨어졌다. 총격전은 계속됐고, 의병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규모나 무기 등에서 열세인 의병부대에게 전투는 유리하게 전개됐다. 다만 탄약이 떨어져 위험해지자 수택은 징을 3번 울려 철수시켰다. 신출귀몰한 전략 덕분에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의병부대는 퇴로에 모여 사라졌다. 그 뒤 능주에는 동요가 울려퍼졌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방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

4월 2일 장흥 우산으로 진을 옮긴 수택은 강문수, 염원숙, 노병우를 매복시켜 한 달에 5차례 일본군과 싸워 30여 명을 사살했다. 또 보성의 안규홍 부대와 연합해 보성 석호산에 진을 치고 보성읍을 공략해 일본군의 예기를 꺾었으며, 수택과 규홍은 여러 의병들과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순종 황제가 일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의병 해산 조칙을 내리자 수택은 1909년 7월 23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현 금정면)에서 참모들을 불러 군대 해산을 선언했다. 혼자서 능주 풍치에 은거하면서 뒷날을 기약하자는 시를 남겼다. “가을바람에 장수와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 고인산을 떠나가니 말조차 더디구나. 왜적을 없앨 날이 마침내 있으리니 3년 동안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마세.”

하지만 수택은 1909년 8월 25일 풍치의 동굴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9월 2일 광주감옥에 갇혔다. 고문과 매질이 계속되면서 하루 3~4번씩 기절했지만, 모진 심문을 굳은 의기로 압도했다. “죽으면 마땅히 사나운 귀신이 돼 맹세코 너희 나라를 없애고야 말 것이다. 일본 정부로 보내 달라. 거기 가서 이 충정을 이야기하고 죽는 것도 이 남일의 소원이다.”

광주감옥에는 선봉장 감무경도 함께 체포돼 같은 방에 갇혔다. 1909년 12월 15일 제2차 담판에서 그는 자신의 4가지 죄를 이야기했다. 원수를 갚지 못해 침략자를 내쫓지 못한 것, 늙은 어머니를 공양하지 못한 것, 죄 없는 백성을 학대에서 구하지 못한 것, 지하에 선왕과 순절한 충신들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강무경은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고, 수택도 대구감옥으로 갔다.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택은 “오백년을 내려온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왜놈의 세상이 된단 말인가. 이 몸이 차라리 죽고 말지언정 원수와 함께 차마 살 수는 없다. 맹서하고 3년을 싸웠지만 마침내 아무런 공이 없었네. 뜨거운 눈물을 어디 쏟으리. 장부가 나서 헛되게 가란 말인가.”

1910년 9월 1일 사형 집행 전 가족과 면회하며 아들 상국을 만난 수택은 신동욱에게 가 의탁할 것을 당부하고, 붓과 종이를 주라고 한 뒤 “해와 달 밝고 밝던 이 나라 강산, 어쩌다 먼지 속에 들어갔느냐. 맑은 날 못보고 지하로 가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라고 썼다. 그는 39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정부는 심수택의 자주 독립을 위한 공로를 인정해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고, 함평 선산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1965년에는 그의 후손들이 광주공원에 순절비를 세웠다.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은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43-2에 있다. 이 기념관은 수택의 손자 고 심만섭씨가 부지를 기증하고, 도비와 군비로 건축했다. 지금은 증손자인 심승남(54)씨가 관리하고 있다. 심승남씨는 “증조할아버님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찾아오신 분들에게 성실히 증조할아버님의 업적을 설명하고, 기념관을 잘 운영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