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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한세충, 북송 휘종때 방납의 난 진압한 명장

2020년 06월 02일(화) 00:00
<초당대총장>
한세충(韓世忠, 1089~1151)의 자는 양신(良臣)이고 섬서성 연안 출신이다. 북송 휘종때 방납의 난을 진압하고 금에 대항한 명장이다.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18세에 군에 들어갔다. 마술(馬術)에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해 장군 왕연의 신임을 얻어 빠르게 승진했다. 선화 2년(1120) 절강의 청계에서 방납의 난이 일어났다. 한세충은 왕연을 수행해 토벌전에 참여했다. 정부군은 1121년 항주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한세충의 공이 컸다. 왕연에게서 2000 병사를 얻어 매복했다가 반란군을 기습해 대승했다. 왕연이 “참으로 만 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장군”이라고 극찬했다. 목주 청계동에 은거한 방납의 무리를 사로잡았다. 계곡을 따라 몰래 진격해 갑자기 공격해 적장을 생포하였다.

강왕 조구가 산동성 제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금군이 제주성을 공격했다. 한세충의 군대는 1000명에 불과했는데 단기로 적진을 공격해 예기를 꺾었다. 금군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강왕을 구하였다. 다음해인 1127년 강왕을 하남성 상구로 옮겼다. 그곳에서 남송의 초대 황제 고종으로 즉위했다. 고종 건염 3년(1129) 묘부와 유정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세충은 장준으로부터 병사 2000명을 지원받아 역모를 분쇄하기로 결심했다. 수주에 주둔해 조정을 지켰다. 중신 여이호가 적을 이길 수 있을지 하문하자 답하기를 “순리로 역적을 토벌하는데 어찌 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처 양씨와 아들 량이 묘부의 군대에 인질로 잡혀 있었지만 동요치 않았다. 묘부는 동생 묘익을 보내 공격하였다. “오늘 모두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라. 만약 얼굴에 화살이 박히지 않은 자는 모두 참형에 처하겠다”고 독려해 묘익군을 격파했다. 묘부와 유정인은 도주했다. 강절제치사로 임명되어 반역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복건성 포성현으로 도망친 유정인 군을 추격해 유정인을 생포했다. 묘부는 이름을 바꾸고 장사꾼으로 변장해 도망가는 도중 동료의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반란 이후 고종은 건강에 머물고 있었는데 금군은 장군 종필의 지휘로 남하해 건강을 포위했다. 고종은 다음해인 1130년 정월 절동의 태주와 온주로 피난하였다. 3월 금군은 강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강남은 수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 수전에 익숙치 못한 금군에게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병참선이 길어 물자 보급에도 애로가 많았다. 한세충은 8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금군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양측은 진강에서 격돌했다. 한세충의 군대가 승리해 종필의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천여 척에 이르는 금군의 배는 장강을 건너는데 실패했다. 금군은 사신을 보내 “강남에서 약탈한 재물을 모두 돌려줄테니 길을 내어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은 진강의 황천탕에서 계속 대치했다. 길을 내어달라는 금의 요청에 “두 황제인 휘종과 흠종을 송환하고 강북의 옛 영토를 되돌려주면 보내주겠다”고 답했다. 금군은 “불화살로 배의 돛대를 쏘아 맞추면 공격하지 않아도 무너질 것”이라는 계책을 듣고 불화살로 공격해 불길에 휩싸인 배들이 흩어졌다. 한세충은 어쩔 수 없이 배를 버리고 진강으로 서둘러 되돌아갔고 종필은 도강에 성공했다.

재상 진회는 금과의 화의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세충은 화의에 반대해 금의 사신이 지나갈 때 습격해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세충의 군대는 3만에 불과했지만 초주에 주둔하면서 금군의 침략을 막고 산동 지방을 공략하기도 했다. 진회의 화의론에 반대하면서 “오랑캐와 화의를 맺으면 시간이 갈수록 인정은 쇠약해지고 국세가 약화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를 다시 되살릴 수 있겠습니까” 태부예천과사라는 한직으로 옮겼다. 집문을 걸어 잠그고 내방객을 사절하였다. 더 이상 군사 문제를 논하지 않았다. 가끔 말 타고 술병을 끼고 유유히 서호 주변을 유랑하였다. 진회가 악비를 처형하자 재상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진회는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모호히 답했다. 한세충은 “그런 말로 천하를 납득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조정을 물러났다. 효종때 기왕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