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215> 여공저, 북송 인·영·신·철종 4대 명신
2020년 01월 14일(화) 00:00
<초당대총장>
여공저(呂公著, 1018~1089)의 자는 회숙(晦叔)으로 지금의 안휘성 수현에 해당하는 수주 출신이다. 북송 인종, 영종, 신종, 철종 4대에 걸쳐 활약했다.

인종때 재상을 역임한 여의간의 3남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부친은 “앞으로 반드시 관직에 올라 황제를 보좌할 것”이라며 큰 기대를 품었다.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영주통판이 되었다. 인종은 숭문원검토, 동판태상사에 임명하였다. 천장각 대제 겸 시독을 역임하였다. 영종이 즉위하자 용도각의 직학사가 되었다. 영종의 생부인 복왕 조윤양에 대한 예우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복왕을 황백고(皇伯考)로 칭하는 것을 반대했다. 영종은 복왕을 ‘친(親)’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휘호를 하사했다. 그는 재차 복왕에 대한 과례(過禮)를 문제삼았다. 간언을 한 조정대신들이 좌천되었으나 영종은 그를 신임하였다.

1067년 신종이 즉위해 한림학사, 지통진은대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개봉지부가 되었다. 상소를 올려 독신적 폐단을 제거할 것을 주청했다. 또 간사한 자는 황제의 뜻에 부합되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고 정직한 자는 대의에 부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므로 황제가 이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희녕 2년(1069) ‘영종실록’의 편찬 업무를 명받았고 어사증승으로 발탁되었다. 왕안석이 신법을 실시해 고리대금을 경감하는 청묘법(靑苗法)을 발포했다. 그는 말하기를 “예로부터 군주는 백성들의 민심을 잃지 않아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과거의 현명한 자들은 모두들 청묘법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왕안석이 대노했다. 신종이 안안석의 측근인 여혜경을 어사로 기용토록 권하자 “여혜경은 재능이 있지만 간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 중용할 수 없습니다.”고 답하였다.

원풍 원년(1078)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는데 육형(肉刑)의 부활에 반대했다. 여러 형벌을 시도했는데도 죽지 않으면 그때 육형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해 육형의 집행을 중단시켰다. 1085년 철종이 즉위하고 황태후 고씨가 수렴첨정하였다. 보수파가 집권하자 시독으로 조정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임금은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덕을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이라고 주청하였다. 간관(諫官)을 임명해 언로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086년 재상직에 올랐다. 토번의 귀장청의가 몰래 서하인과 공모해 희주와 민주를 점령했다. 여공저가 군대를 파견해 한 달만에 귀장청의를 생포하였다. 1088년 재상직을 물러났고 1089년 72세로 죽었다. 철종은 태사와 신국공의 벼슬을 내리고 정헌(正獻)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순성후덕(純誠厚德)이라는 친필 묘비도 하사하였다.

그가 경사에서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낡은 옷을 입고 비천한 집안의 자제 행색을 하였다. 후에 그가 여의간의 자제인 것을 알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는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워도 부채질 하지 않고 추워도 불을 쬐지 않았다.

젊었을 때 왕안석과 친분이 깊어 왕안석이 그를 형처럼 대했다. 왕안석의 언변은 대적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그만이 식견과 간결한 언변으로 설복시킬 수 있었다. 왕안석이 재상으로 중용된 후에 자신을 도와줄 것을 믿었는데 오히려 여러 번 자신의 자질을 문제 삼자 둘의 관계가 끊어졌다.

영주 지주로 있을 때 구양수와 친해졌다. 구양수는 처음에는 그가 재상의 자제이고 선망이 있어 예우했지만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의 학식과 인품에 감동해 황제의 측근에서 일해야 할 인재라고 조정에 적극 추천했다. 조정 중신들에게도 그가 청정하고 옛 군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고 극찬했다. 구양수가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요의 사람들이 송나라에 덕행과 문장을 겸비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여공저와 왕안석을 추천했다.

성품이 과묵하고 처신이 무거웠다. 사람들이 농담을 하다가 정도를 지나치면 늘 여공저가 정색을 하고 제지하였다. 장우석이라는 사람은 옷차림이 초라하고 언동이 거칠어 남들의 조소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공저만은 결코 한마디도 놀리지 않아 그가 감격해 울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