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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유럼 예술기행] <4>이탈리아-플로니카
엘바 섬에 어린 나폴레옹의 긴 그림자
2018년 09월 18일(화) 00:00
폴로니카 해변의 중세 망루와 오른편 멀리 보이는 엘바 섬.
로마시대에 공중목욕탕이었다는 테르미니역에서 토스카나 해변의 소도시 폴로니카까지 특급열차로 2시간 걸린 것 같다. 폴로니카역 광장은 한산하다. 공작새 날개 같은 종려나무 잎들이 싱그럽다. 예약한 골포 델 솔레(Gofo del sole) 방갈로까지는 승용차로 15여 분 거리란다. 이탈리어로 ‘골포’가 태양이고 ‘솔레’가 해변이니 ‘태양의 해변’에 있는 방갈로다. 역 뒤편으로 돌아가니 공공주차장 이름이 ‘천안문 희생자 광장’이다. 다 알다시피 천안문 사건이란 1989년 6월 4일에 중국 계엄군이 탱크를 동원하여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던 사건.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권의식 때문에 나와 더 친숙해지는 느낌이다. 고결한 분노와도 같은 5·18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광주사람들만의 인지상정이 아닐까도 싶고.

방갈로에 짐을 푼 뒤 해변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본다. 이마에 땀이 날 때쯤에 막다른 길이 나오고 중세 유물이 하나 보인다. 망루나 탑이라는 뜻의 토레(Torre)다. 망루에 붙여 건축한 ‘토레 모짜 호텔’ 옆에 카페가 하나 있다. 카페에서 보니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엘바 섬이 훨씬 더 잘 보인다. 나폴레옹이 유배생활을 했던 섬이다. 엘바 섬을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북쪽에 있는 피옴비노 항구에서 배를 타고 엘바 섬의 포르토페라리오 항에 내리면 된다는데, 여객선 운항시간이 잘 맞아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나폴레옹에게 흥미를 갖는 이유는 그의 입지전적인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다. 당대 예술가들을 반하게 한 그의 매력이 궁금해서이다. 베토벤도 나폴레옹에게 매료당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에 용맹을 떨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베토벤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 비서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격동돼 참지 못했다. 때마침 베토벤은 플라톤의 ‘공화국’을 읽고 감동한 뒤였으므로 나폴레옹이야말로 시대의 영웅이라고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곡한 곡이 그의 교향곡 3번 ‘영웅’이었다. 그런데 베토벤과 나폴레옹의 인연은 거기까지 뿐이었다.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 3번 ‘영웅’ 악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서 보내려고 했을 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던 것이다. 민중의 영웅이 되기를 바랐던 베토벤은 실망한 나머지 보내려던 악보 사본을 찢어버리면서 외쳤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아무튼 나폴레옹을 전설화하는 데는 베토벤뿐만 아니라 소설가들도 가세했다. 스탕달은 곧잘 나폴레옹파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의 대표작 ‘적과 흑’에서도 등장인물을 통해서 위선적인 검은 수도복보다는 빨간 군복을 입고 싸우겠다는 등 나폴레옹 시대를 두둔했고, 아버지가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었던 빅토르 위고도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나폴레옹 군의 용맹을 묘사했던 것이다.

13세기에 그려진 공동우물가의 벽화 ‘다산의 나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사마리티마 전경.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사마리티마 전경.










나폴레옹은 프랑스령 외딴 섬인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가난을 면하고자 10살에 브리엔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6살에 포병사관이 된다. 그리고 8년 후 툴롱 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소장으로 특진하고 일약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이 된다. 그리고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포공격으로 제압하고 나서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이후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파죽지세로 제패하고, 프랑스의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을 정립한다. 그러나 무모한 러시아 원정실패와 전쟁 후유증으로 인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루이 16세와 인척 관계인 루이 18세가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루이 18세는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처럼 행세하다가 인기를 잃는다. 따라서 민중들은 나폴레옹을 그리워했고, 재기를 꿈꾸던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민중들의 영웅으로 다시 등장한다. 얼마 후 나폴레옹은 정치적 발판을 다지기 위해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루허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과 워털루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허망하게 패배하고, 그의 장엄했던 시대도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은 또 다시 대서양 남쪽에 버려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1821년 5월 5일 새벽 5시에 영원히 눈을 감는다.

나폴레옹이 두 번째 유배지였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나폴레옹의 예견은 그의 사후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소설과 평전, 연구서와 에세이, 논문이 무려 60만 종이 넘는다고 하니까.

엘바 섬을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젤라또를 먹는다. 이탈리아가 음식의 나라인 것을 실감하고 있다. 밀을 소재로 하는 빵이나 스파게티 등의 음식종류가 다양하며 식사 후에는 반드시 후식으로 젤라또를 먹는 것이다. 국수와 단것을 좋아하는 내 식성에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폴로니카에서 승용차로 40여 분의 거리인 마사마리티마 고성(古城)으로 가려고 나선다. 폴로니카와 마사마리티마는 모두 그로세토 현의 작은 도시(코무네)들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사마리티마 고성. 우리로 치자면 읍 규모의 도시인데 호텔, 식당, 광장, 성당, 카페, 옷가게, 골동품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골목은 전부 반질반질한 돌과 계단으로 성채를 향해서 나 있다. 골동품상점에 들어가니 내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란다. 단체관광객이 오지 않는 곳이니 당연할 수밖에. 여기 말고도 토스카나 주도에는 고즈넉한 고성이 많다고 한다. 피사 공국과 시에나 공국, 피렌체 공국이 서로 각축을 벌이는 시기 이전에도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용이하므로 산봉우리에 성을 쌓고 마을을 이루었을 법하다.

성채까지 올라갔다가 골목을 타고 내려오니 두오모 광장이 있고, 마사마리티마 성당이 우뚝 서 있다. 12세기에 조성한 성당이라고 하니 그 자체가 박물관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중세기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은 프레스코화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그레고리오라는 명문이 새겨진 대리석관 조각이 섬세한데 설명문에 1324년 조성이라고 쓰여 있다. 거리에서 어린 양이 십자가를 등에 진 조형물을 보았는데 성당 대리석벽에도 양각돼 마치 마사마리티마 고성의 문양 같기도 하다.

마사마리티마 출신의 가톨릭 성인으로는 15세기에 활동했던 베르나르디노가 유명하다고 한다. 1402년 프란체스코회에 들어가 설교가로 활동했고, 그리스어 예수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고 한다. 프란체스코회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연구로 ‘성모승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겠다.

광장으로 다시 나오니 은퇴한 노인들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탈리아 정치를 논하는 듯, 한 노인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탈리아 노인들도 우리나라처럼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은 듯하다. 한 노인이 토론에 참여하라고 나에게 손짓을 한다. 그러나 나는 사양을 하고 마사마리티마 고성 아래쪽으로 내려가 본다. 지난 2000년에 공동우물 벽에서 희한한 프레스코화 한 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서다. 새똥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망을 쳐서 보호하고 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로 노골적인 프레스코화다. 1265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의 정중앙에는 가지를 풍성히 드리운 나무가 있고, 가지에는 남근 25개와 고환들이 매달려 있다. 사람들은 ‘다산의 나무’(Tree of Fertility)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우물물을 뜨러 오는 여인들이 남자의 생식기를 보고 다산을 빌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더욱이 벽화 속의 한 여성이 막대기로 남근을 따려는 듯한 동작을 하고 있는데, 중세 서양미술에서 남근과 고환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표현은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제작 연대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경쟁하는 시기였으므로 그 확실한 제작 의도와 의미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정치적인 의미보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벽화라고 추정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지 아닐까도 싶다. /글·사진=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