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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11) 신을 버리고 부처를 찾았던 카잔차키스
삶은 구원의 여정 이자 투쟁 … 자신을 이겨낸 사람이 승리자
유럽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화 미노아문명 꽃피웠던 크레타 섬
잦은 식민지배로 ‘조르바’ 여인숙의 늙은 여주인 같이 변해버린 곳
2017년 09월 07일(목) 00:00
공원에서 바라본 크레타 제2의 도시 하니아.
아테네의 여정을 마치고 일행은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크루즈로 승선한다. 크루즈는 내일 아침에 그리스 섬 중에서 가장 큰 크레타에 기항할 예정이다. 크레타의 주도 이라클리온은 카잔차키스의 고향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번 여행의 종착지이다. 나머지의 여행은 휴식을 위한 덤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하얀 건물과 푸른 창문과 대문 일색인 산토리니는 애당초 내 머릿속에 없었다. 오직 크레타만이 내 영혼을 지배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카메라 가방에 넣고 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낸다. 책 날개에 카잔차키스의 고백이 보인다. 그가 남긴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것들은 여행과 꿈이었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내 투쟁에 도움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부처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호메로스는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으며, 부처는 세상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새까만 눈이었다.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못 얻어 나를 괴롭히던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었으며, 니체는 새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으며, 조르바는 사람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조르바, 나는 조르바 앞에서보다 더 수치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

카잔차키스의 고백 중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처가 그의 영혼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는 구절이다. 나 역시 불교에 매료되어 살아온 작가로서 동질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면 곳곳에 불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특히 ‘부처와 목자의 대화’라는 내용에 있어서는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를 아예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가 영역의 숫타니파타를 읽었는지 오역의 문장이 눈에 띄는데 옥의 티처럼 보인다. 부처님 시대의 언어인 팔리어로 된 숫타니파타를 직역한 전재성 박사의 문장은 이렇다.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세존(부처)이 말했다.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처럼 팔리어를 직역한 문장을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소설 속의 문장은 영역하면서 역자의 주관이나 오류가 끼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목자는 농경 목축생활의 행복을, 부처는 깨달음의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니야와 부처의 대화가 이중창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다. ‘소유나 존재냐’를 쓴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야가 소유지향적인 삶을, 부처는 존재지향적인 삶을 노래하듯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일행 모두 10층으로 올라간다. 배는 지중해를 향해 에게 해를 지나고 있다. 멀리 있는 섬들은 어둠의 심해 속으로 잠수한 듯 보이지 않고 불빛만 명멸하고 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은사님께 서양의 불교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카잔차키스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것은 그때 이미 불경이 서양에 번역되어 지식인들 사이에 읽혀졌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재임한 적이 있는 은사님께서 서양의 불교와 불교문학의 배경을 설명하신다.

“헤르만 헤세의 한 편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고 있지요. ‘독일에 있어서 인도연구 또는 불교연구의 근원은 프리드리히 슐레겔,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 등에서 비롯되며 이 세 사람이 독일불교의 아버지가 된다.’ 범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연구는 프랑스와 영국이 앞섰지만 불교문학에 있어서는 독일이 앞섰지요. 독일의 불교사상이나 불교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쇼펜하우어에게서 깊이 영향을 받은 두 제자가 있지요. 철학에서는 니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술가로서는 바그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고 보니 카잔차키스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은 니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니체가 ‘새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어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새로움이란 부처와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부처의 가르침이 원죄의식에 시달리던 그에게 자부심을 주지 않았을까. 식사를 끝내고 흡연할 수 있는 테이블로 나간다. 배는 아직도 검푸른 에게 해를 건너고 있다. 배 옆구리를 치는 파도소리가 제법 크다.

“쇼펜하우어의 제자인 바그너가 마틸데 베젠동크라는 부인과 사귄 적이 있지요. 두 사람 간에 주고받은 편지들이 있는데, 그중에 불교를 얘기하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이지요. ‘불교의 세계관에 비교하면 다른 어떤 도그마도 바보 멍청이같이 보이고 맙니다.’ 바그너가 쓴 오페라 대본 ‘승리자’는 불교가극입니다. ‘승리자’는 ‘법구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유래하지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모든 승리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그러니까 ‘승리자’는 자기를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이지요.”

일행은 일찍 헤어져 각자의 객실로 돌아간다. 배는 내일 아침 해 뜨는 시각에 크레타 하니아 항구에 도착할 것이다. 해가 솟아오르면 크레타의 풍광이 해맑게 드러나리라. 나는 더 맑은 정신과 기운으로 크레타를 보기 위해 일찍 자리에 눕는다. 손을 뻗어 전원스위치를 누르자 객실에 차 있던 불빛이 순식간에 에게 해로 빠져나가 버린다. 커튼을 슬쩍 열어보니 바다가 옆에 붙어 있다. 밤거리를 어정거리는 여자의 슬픈 몸뚱이 같다. 배는 바다에 흰 상처를 내며 크레타를 향해 가고 있다.

기원전 8세기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크레타. 그리스 섬들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동서의 길이가 260㎞에 이르고 남북의 폭이 60㎞ 정도로 고구마 같은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큰 산맥이 세 개나 있으므로 산과 협곡이 많은 것도 섬의 특징인데, 남쪽 지형은 주로 가파른 경사면으로 지중해와 맞닿아 있고, 크레타 해를 껴안은 북면에는 포구가 많은데 그리스 본토와 160㎞쯤 떨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스문명의 시원이 되는 크레타문명은 기원전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시대의 문화인 미노아문명을 꽃피웠던 섬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고대 로마, 동로마제국, 아랍의 지배, 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한 베네치아의 400여 년 통치, 또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본래의 역동적인 문화는 시들어버리고 지배국들의 종교와 군사문화가 이식돼 크레타의 모습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등장하는 여인숙의 늙은 여주인같이 변해버린다. 소설 속에서 여인숙 여주인은 2차 대전 때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러시아 4개국 함대의 제독들이 자신을 사랑했다고 자랑하지만 크레타는 슬프게도 ‘동지중해의 항공모함’이라는 별칭을 얻고 만 것이다.

죽음 같은 ‘꿈 없는 잠’이란 이런 것일까. 하룻밤이 광속으로 지난 것 같다. 밖으로 나와 보니 크레타 해의 물빛은 온통 쪽빛이고, 크레타 제2의 도시 하니아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멀리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할 때 건설했다는 요새와 등대가 보인다. 하니아는 단발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의 그리스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상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크레타 해와 항구도시 하니아를 담아 본다. 그러나 하니아의 도시 반쯤은 역광 상태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이윽고 일행은 배에서 내려 각자의 취향대로 2개조로 나눈다. 나와 은사님, 그리고 길진현 동문은 크레타의 주도 이라클리온으로 방향을 잡는다.

/글·사진 정찬주 작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