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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시간속을 걷다]<9> 1535년 영암 열무정
왜구 겨누던 활 시위 … 오백년을 이어왔다
2017년 05월 25일(목) 00:00
영암읍성 동문밖 동무리 62번지에 있는 옛 열무정.
‘달뜨는 산’ 영암 월출산이 활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사대(射臺)에 오른 열무정(閱武亭) 한 궁사가 활시위를 한껏 당긴다. 활을 틀어쥔 ‘앞손은 태산을 밀듯이’(前推泰山), 화살을 건 시위를 당기는 ‘뒷손은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듯이’(後握虎尾) 한다. 숨을 멈추고 신중하게 과녁을 겨냥한 뒤 활시위를 놓는다. 사대에서 과녁까지는 145m 거리. 반원을 그리며 시원스레 날아간 화살이 가로 6자6치(2m), 높이 8자8치(2.67m) 과녁에 적중한다. “관중(貫中)!”



◇잦은 왜구 침입에 활쏘기 적극 장려=열무정은 영암 스포츠 테마파크 내 군민체육센터 옆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영암읍성 동문밖에 있었으나 최근 4차례 옮긴 후에 2013년 12월 현재 자리에 활터를 현대식으로 신축해 이듬해 3월 현판식을 가졌다. 열무정은 480여 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타지역 사정(射亭)과 달리 활 쏘는 이들을 후원하는 조직이 따로 마련돼 있는 것이 이채롭다. 바로 ‘사포계’다. 열무정은 1535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포계는 1797년(정조 21년) 창설됐다.

“열무정과 사포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집사(社), 베포(布)에 벼화(禾)변이 붙어있는 계(契)자를 쓴다. 열무정을 지원하는 것은 사포계의 전통이고 역사이다.”

사포계 황용주(68) 공사원(전 영암 여중·고 교장)의 설명이다. 활터 우두머리는 사두(射頭), 사포계의 경우 공사원(公司員)이라고 호칭한다. 열무정은 18일 영암읍 궁전예식장에서 사포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사원 이·취임식을 가졌다. 6년 동안 사포계를 이끌어온 전임 윤흥진(89) 공사원이 신임 황 공사원에게 사포계 기(旗)를 전달하며 지원 업무를 인계했다.

열무정의 역사는 4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중종 30년인 1535년 영암에 활터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은 잦은 왜구 침입과 관련이 깊다.

배원식(67) 사두는 “1370년대를 전후해 왜구들이 영암 등 남해안을 노략질했다. 그때문에 광주 송정리에 있던 육군 총사령부 격인 ‘병영성’이 1417년 강진으로 옮겨져 축성됐다. 영암은 남쪽을 방어하는 보장처(保障處)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이름없이 ‘활을 쏘는 정자’라 해서 ‘사정’(射亭)이라고 불렸다. 영암의 관리와 선비들이 주로 활을 쏘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口傳)으로는 영암지역을 순시하던 암행어사가 영암 향사(鄕士)들이 열심히 궁술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고 감탄해 정자 중수(重修) 기금을 내렸다고 하고, 열무정이라는 정호(亭號)도 나라에서 하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향사(鄕射)모임 결성 뜻 이어받아=반면 사포계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열무정이 소장한 사포계 문서(전남도 문화재자료 160호 지정)는 24책이다. 그중 하나인 ‘정사년 5월 사포계안(案)’에 따르면 1797년 음력 5월에 사포계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향사(鄕射)의 모임을 결성한 뜻을 본받아 이 고장에서도 사포계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관에서 (구리) 20관(貫)을 보조해 주어 차차 무예를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해 나간다면 인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고, 향리의 풍속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때 관(官)에서 구리 20관과 ‘사포’(社布)라는 이름까지 내려주었고, 이교(吏校=조선시대 지방관아에 소속된 하급관원)와 한량(閑良) 등 120명이 함께 계안을 작성했다. 계원들은 각자 5전씩 갹출해 계 운영자금을 보충했다. 220년 전에 활 쏘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계가 조직돼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사포계 지원으로 부흥기 맞아=현재 열무정 사원은 20∼80대 연령의 50여 명, 사포계 계원은 70여 명이다. 사원은 집궁례를 마친 활 쏘는 이들로만 구성되지만 사포계는 궁도인이 아닌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다.

열무정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1960∼1970년대를 거치며 다소 침체됐다. 시대적인 분위기때문에 주민들이 활쏘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열무정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소화 12년) 6월 4일 전국 규모 대회를 개최했다. 현재 ‘전선궁술대회(全鮮弓術大會) 대회규정’ 문서가 남아있다. 또한 열무정은 1919년 지역 유지들이 3·1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 회합장소로 사용한 유서깊은 장소이다.

열무정은 2010년대 들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본래 활터가 있던 영암읍 동무리 일대 토지가 ‘영암읍 동무지구 소도읍(小都邑) 육성사업’(2009∼2011년)에 수용되며 받은 보상비로 사포계가 궁도인 육성과 저변확대에 발벗고 나섰다. 그 결과 서영준(52) 총무 등 젊은 세대들이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2012년 ‘제94회 광주·전남 서남부 지역 15개정 궁도대회’단체전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2013년 전남도지사기 궁도대회 준우승, 2015년 제17회 전국 남녀 궁도대회 단체전 우승, 올 4월 제56회 전남도체육대회 궁도 개인전 우승(송태근) 등 쾌거를 거뒀다. 특히 창건 480주년을 맞은 2015년부터 ‘영암군수기 전남 남녀 궁도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열무정은 지난 2007년 책으로 묶어낸 사포계 고문서 외에 근·현대기에 작성된 문서들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영암군의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 이러한 문서는 단지 한 활터의 기록이 아니라 지역 향토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영암읍성 동문 앞 동무리 67번지에 있는 옛 열무정을 찾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한옥이다.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형식을 갖췄다. 네 차례 수리를 거치며 원형을 보존했다. ‘백 걸음 바깥의 버드나무잎을 꿰뚫어라’(百步之外穿楊),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쏘아라’(正己以後發矢) 쓰인 주련이 눈길을 끌었다. 월출산을 바라보며 호방하게 활 시위를 당기는 선비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