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933년 북동성당] 광주 선교 탯자리 … 현대사 품은 시민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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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933년 북동성당] 광주 선교 탯자리 … 현대사 품은 시민의 안식처
2016년 05월 18일(수) 00:00
1933년부터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광주북동성당은 광주 천주교 선교의 탯자리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본당 건물은 광주시 지방문화재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낡은 나무 문을 밀고 광주 북동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미사를 드리는 신자들의 경건한 모습이 보인다. 이 때 들려오는 소년들의 맑은 노래 소리. 광주평화방송 ‘피아트 도미니’(Fiat Domini·주를 따르라) 소년합창단이다. 아름다운 화음으로 이루어진 합창은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청아한 소년들의 목소리는 더욱 마음을 울린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소년들은 매월(둘째주 토요일 오전 10시) 북동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성음악 미사’를 봉헌한다.

예배당을 나오니 성모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여성 두명이 보였다. 서울에서 광주를 찾은 그녀들은 일부러 북동성당을 찾았다. 천주교 신자인 두 사람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북동성당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이들이 떠난 후 성모 동산 앞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성당은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위로를 주는 공간이다. 해외 여행에서 많은 이들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도 성당이다. 화려한 성당도 좋지만 오랫동안 인상에 남는 건, 여행 중 숙소 근처에서 만난 아주 작고 소박한 성당이다.



광주롯데백화점 맞은 편에 위치한 북동성당은 광주 천주교 선교의 ‘탯자리’이자 광주 신자들의 ‘고향’이다. 1948년 독립한 남동성당을 비롯해 계림동 성당(1964), 월산동 본당(1965) 등 많은 성당이 북동성당을 모태로 하고 있다. 현재 광주·전남 본당은 137개, 신자는 35만5923명이다.

북동성당의 출발은 광주 선교의 시작이기도하다. 1899년 도청 소재지가 나주에서 광주로 이전했지만 지역 선교는 열악했다. 1929년 나주 노안본당 박재수 주임 신부가 광주 신자들을 위해 첫 미사를 봉헌했고, 1933년 광주 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천주교 단위교회로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가 광주본당으로 승격하면서 북동성당이 시작됐다. 당시 신자수는 70명이었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현재 성당 건물은 1937년 착공해 1938년 완공됐다. 4대 구 토마스 주임 신부는 당시 6000달러를 모금한 후 중국인 기술자 가(哥) 요셉을 초청, 성당을 지었다. 폭 9.3m, 길이 25.5 m 규모 성당은 붉은 색 벽돌을 쌓아올린 종탑과 화강석으로 소박하게 장식한 출입구가 인상적이다. 본당 건물은 1999년 광주시 지정기념관 제25호(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북동성당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제 치하였던 1943년엔 일본인 와키다 아사고로가 광주교구 2대 교구장으로 취임, 북동 성당에 상주했다. 북동성당과 거의 삶을 같이 해온 신자 정태일(82·요셉)씨는 6·25와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민군 정치공작대 본부로 쓰이면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했죠. 개인집과 성당 앞 목조 건물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어요. 성당에 있던 촛대 등 성물을 친구들과 다른 곳으로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 꼭 생쥐들 처럼요. 종교 시설이라 당시 폭격을 하지는 않았어요. 인근 광주역(구역)은 난리가 났지만 성당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죠. 건물에 기관총탄 자국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북동성당은 한국 농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함평고구마사건’과도 인연이 깊다. 1976년 함평군 농협은 고구마 수매계약을 이행하지 않아 농민들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배상은커녕 협박만 일삼았다. 농민 60여명은 1978년 4월 24일 북동성당에 모여 단식농성을 시작했고 윤공희 대주교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단이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을 위한 농민의 기도회’를 집전했다. 미사 후 시위에 나서려는 회원들은 성당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고, 며칠 후 배상 판결을 받았다.

1980년엔 정규완 주임 신부가 계엄사에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금남로 시위대가 밀리면서 학생 200∼300명이 성당으로 몰려들었고 계엄군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자 정 신부는 “성당은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며 엄중히 항의했다. 학생들은 성당 담을 넘어 개인집을 통해 도피했지만 정신부는 계엄군에 연행됐다 한달만에 석방됐다.

북동성당은 교육에도 힘쓰며 지역사회와 호흡해 왔다.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을 위해 신성학술강습원을 열었고 양재학원도 설립했다. 1947년에는 성심유치원을 개원하고 1966년에는 신협도 문을 열었다.

북동성당을 거쳐간 주임신부는 33명. 이중 외국인 신부는 18명이었다. 정태일씨는 특히 외국인 신부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검소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신부님들은 성당 텃밭에 야채를 심어 소박하게 드시곤 했어요. 사제관 침대가 너무 오래돼 앉으면 삐그덕거리고 무너질 상황이었지만 전혀 상관치 않으셨어요. 외출할 때 입는 옷도 구호물자에서 골라 입고 다니셨습니다. 신앙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언제나 모범을 보이셔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북동성당은 지금 공사중이다. 롯데백화점 정문 쪽을 탁 트인 공간으로 만들어 초창기 처럼 성당 모습이 ‘온전히’ 보이도록 할 계획이다. 오요안 주임신부는 “한동안 건물에 가려 성당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시민들이 북동성당 존재를 알지 못했다”며 “이번 공사를 통해 성당이 신도들 뿐 아니라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심 한 복판에 위로와 힐링 공간이 자리하는 건 큰 복이다. 신자 뿐 아니라 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 바로 북동성당이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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