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눈감은 법률가는 위험하다 -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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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눈감은 법률가는 위험하다.”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저명한 법사학자로 손꼽히는 미하엘 슈톨라이스(Michael Stolleis) 교수가 생전에 남긴 글의 제목이다.
그는 전후 서독에서 금기시되던 법조계의 나치 불법을 본격적으로 다룬 몇 안 되는 법학자들 중 한 명인데 역사에 무지(無知)하고 역사를 애써 외면하는 법률가들이 악법인 실정법만을 떠받드는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는 글에서 법률가들이 법을 잘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수년 전에 슈톨라이스 교수의 번역책을 펴내면서 책의 여러 곳에다 위 경구(警句)를 담아두었다. 마침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첫 해여서 나름의 기우(杞憂)에 마치 부적처럼 붙여둔 셈이다. 그런데 불길한 예감은 늘 벗어나는 법이 없다. 곧바로 8월 15일이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등으로 일제 강점하의 친일(親日)을 옹호해온 인물들이 역사 관련 기관장으로 임명되고,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놓여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등이 이어졌다.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도 이와 비슷했었다.
일제 강점하의 사법(司法)을 별다른 반성과 숙고 없이 해방 이후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해오면서 인적 청산은 물론이고 관료화된 권위주의적 사법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1987년의 민주화 이후에 절차적 차원에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사리 이뤄졌지만, 사회 민주화는 요원하고 권력을 쥐고 있던 군부가 사라진 빈자리에서 검찰과 법원의 사법권력이 득세해왔다. 급기야 검찰개혁에 끝내 저항하던 전직 검찰총장이 곧바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는 말 그대로 검찰공화국이 출현했고 유감스럽게도 위헌·위법한 12.3 비상계엄 및 내란과 함께 그 끝을 맞이했다.
최근 국내에 나치 시절의 법률가들을 다루는 여러 책이 출간되는데 이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치체제에 영합한 게 아니다. 이들은 1919년 독일 땅에서 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 들어선 바이마르공화국 자체에 이미 적대적이었다. 이전의 독일제국에서 판사와 검사로 누려오던 기득권이 훼손되면서 민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그래서 혹자는 “황제정의 몰락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에 의해 임명된 법관들에게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고 표현한다.
이 반감은 그대로 편향된 계급사법과 정치사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극우세력이 벌인 형사범죄는 대체로 가볍게 처벌하면서 좌파세력이 행하는 ‘분열적인 시도’에는 중형 선고가 잇따랐다. 즉 바이마르공화국 초기에 우파에 의해서 자행된 314건의 살인사건에서 평균 2개월의 형이 선고된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15건의 살인사건에서 8건에는 사형 그리고 나머지 7건에는 평균 14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심지어 1923년 11월에 히틀러와 나치당원들이 벌인 이른바 ‘뮌헨폭동사건’의 재판에서 당시 재판부는 이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벌인 일이라면서 관대한 형을 선고했고 히틀러는 고작 몇 개월만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다. 당시 히틀러는 이전의 다른 사건으로 집행유예 중인 상태였고 이 폭동으로 인해 경찰관 4명이 사망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또한 당시 재판에서 공화국보호법상 반역죄를 범한 외국인에게 규정되고 있던 국외추방조치도 명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당시 오스트리아 국적이었는데도 직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한 점을 고려한다는 논리였다. 지금 같으면 마땅히 법왜곡죄로 처벌될 재판이다. 극우민족주의 성향인 해당 재판장은 짐작되듯이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 뮌헨고등법원장 등으로 중용되었다. 전후의 탈(脫)나치화 과정에서 이미 사망한 이 판사의 미망인에게는 유족연금 삭감조치가 뒤따랐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 사법(司法)은 나치운동의 폭력적 성격을 인정하기를 애써 외면했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및 홀로코스트의 참상에 있어서 당시의 독일 사법이 이와 전혀 무관하지가 않다. 우리 경우에도 사법 불신(不信)이 이미 오래전부터 불거져 온 일인데도 자체 개혁에 내내 소극적이다가 최근 재판소원과 법왜곡죄 도입 등을 두고서는 황당한 논리를 앞세워서 반발하는 사법부의 행태를 접하면서, 슈톨라이스 교수가 남겨둔 위 경구가 다시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런데 역사 앞에 눈감고서 위험한 게 어디 법률가뿐이겠는가.
그는 전후 서독에서 금기시되던 법조계의 나치 불법을 본격적으로 다룬 몇 안 되는 법학자들 중 한 명인데 역사에 무지(無知)하고 역사를 애써 외면하는 법률가들이 악법인 실정법만을 떠받드는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는 글에서 법률가들이 법을 잘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에 나치 시절의 법률가들을 다루는 여러 책이 출간되는데 이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치체제에 영합한 게 아니다. 이들은 1919년 독일 땅에서 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 들어선 바이마르공화국 자체에 이미 적대적이었다. 이전의 독일제국에서 판사와 검사로 누려오던 기득권이 훼손되면서 민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그래서 혹자는 “황제정의 몰락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에 의해 임명된 법관들에게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고 표현한다.
이 반감은 그대로 편향된 계급사법과 정치사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극우세력이 벌인 형사범죄는 대체로 가볍게 처벌하면서 좌파세력이 행하는 ‘분열적인 시도’에는 중형 선고가 잇따랐다. 즉 바이마르공화국 초기에 우파에 의해서 자행된 314건의 살인사건에서 평균 2개월의 형이 선고된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15건의 살인사건에서 8건에는 사형 그리고 나머지 7건에는 평균 14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심지어 1923년 11월에 히틀러와 나치당원들이 벌인 이른바 ‘뮌헨폭동사건’의 재판에서 당시 재판부는 이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벌인 일이라면서 관대한 형을 선고했고 히틀러는 고작 몇 개월만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다. 당시 히틀러는 이전의 다른 사건으로 집행유예 중인 상태였고 이 폭동으로 인해 경찰관 4명이 사망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또한 당시 재판에서 공화국보호법상 반역죄를 범한 외국인에게 규정되고 있던 국외추방조치도 명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당시 오스트리아 국적이었는데도 직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한 점을 고려한다는 논리였다. 지금 같으면 마땅히 법왜곡죄로 처벌될 재판이다. 극우민족주의 성향인 해당 재판장은 짐작되듯이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 뮌헨고등법원장 등으로 중용되었다. 전후의 탈(脫)나치화 과정에서 이미 사망한 이 판사의 미망인에게는 유족연금 삭감조치가 뒤따랐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 사법(司法)은 나치운동의 폭력적 성격을 인정하기를 애써 외면했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및 홀로코스트의 참상에 있어서 당시의 독일 사법이 이와 전혀 무관하지가 않다. 우리 경우에도 사법 불신(不信)이 이미 오래전부터 불거져 온 일인데도 자체 개혁에 내내 소극적이다가 최근 재판소원과 법왜곡죄 도입 등을 두고서는 황당한 논리를 앞세워서 반발하는 사법부의 행태를 접하면서, 슈톨라이스 교수가 남겨둔 위 경구가 다시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런데 역사 앞에 눈감고서 위험한 게 어디 법률가뿐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