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도서관 가는 길 - 김향남 수필가
2026년 02월 23일(월) 00:20
가끔 동네 도서관에 간다.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면 해방감과 함께 설렘이 인다. 등에 멘 가방과 머리에 쓴 모자, 귀에 꽂은 이어폰은 그 징표다. 도서관에 간다기보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 같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먼저 앞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쬔다. 밝고 환한 공기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다 안으로 들어간다. 오른쪽에 작은 카페가 있고 왼쪽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다. 나는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향기만 취할 때도 있지만 2층 서가로 오르는 발길에는 뭐랄까, 오랜 친구의 방을 방문할 때와 같은 편안함이 묻어난다. 키 낮은 서가 사이의 어둑한 그늘, 창가에 번지는 햇빛, 커피 향이 스며든 실내. 도서관은 부드러운 온기로 채워져 있다. 책들은 전혀 위압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다. 어서 자신을 펼치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서가를 메운 것은 책들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저마다의 세계에 침잠한 이들의 고요한 뒷모습이 있다. 누군가는 형광펜으로 조심스레 밑줄을 긋고, 누군가는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잠시 허공을 응시한다. 눈동자는 활자를 좇고 있지만 그 안쪽에서는 각자의 사연이 조용히 흔들리는 듯하다. 책을 읽는 얼굴들은 대체로 고요하다. 작은 기침 소리, 종이 스치는 마찰음, 의자가 미세하게 끌리는 소리까지도 고요를 뒷받침해준다. 나는 그 틈을 천천히 지나며 읽고 있는 책보다 읽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훔쳐보게 된다.

내가 서가에 머무는 시간은 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책의 제목들을 죽 훑어보거나 빌려 갈 책을 찾아놓은 후 손에 잡히는 대로 뭐든 꺼내 읽는다. 그러나 ‘몰입’의 시간은 짧고 책 속의 문장들은 자꾸 딴 데로 새버린다. 나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자꾸 흩어지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게 상책이다. 서가 사이의 고요도 좋지만 나를 잡아끄는 것은 아직 다 읽지 못한 ‘길’의 여백이다. 책장을 덮고 문을 나서면 길은 다시 살아있는 텍스트가 되어 나를 반길 것이다.

사실 내 목적은 도서관이 아니다. 나를 부르는 건 책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 자체다. 산 밑에서 첫발을 내민 길은 작은 개천을 따라 도서관을 지나고 시내를 관통하여 멀리 바다로 향한다.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의 선이 아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의 꼬리이며 해찰하기 딱 좋은 넉넉한 빈칸이다. 풀과 나무와 물과 바람이 어우러진 풍경의 문장이며 시공을 넘나드는 기억의 책갈피다. 바람은 마중 나온 강아지처럼 촐랑거리고, 물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가만가만 흐른다. 나는 한껏 게으른 걸음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는 강 건너편에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함께 모여 배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 배는 어린 나에게 세상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다. 배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소음은 아득해지고 오로지 물과 나만이 존재하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사공의 노젓는 소리, 찌그덩거리는 배의 율동, 얼굴을 스치는 강바람, 익숙하면서도 낯선 강의 표정. 그 건너감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저편에 닿곤 했다.

물 위에 뜬 배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껴안아야 했다. 한편으론 불안했지만 그러나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기도 했다. 비 오고 바람 몹시 부는 날이면 발밑은 출렁거리고 배는 심하게 조리질을 쳤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균형이 있었다. 배가 물살을 가르는 동안 나는 어린아이이면서도 이미 어떤 통과의례를 치르는 존재였다. 그 틈새를 가로지르며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다.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길 위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기분이다. 햇빛과 바람, 물소리와 발걸음이 한 줄 한 줄 문장이 되어 내 안을 간지럽히는 까닭이다. 길 위에서 주워 담은 날것의 문장들이 아직 살아 움직이는 중인데 책 속의 활자들이 쉬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나는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방금 읽고 온 풍경의 여백을 다시 헤아려 본다.

어쩌면 내가 읽은 첫 번째 책은, 아니 그 모든 책들은 길 위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길은 또 다른 나룻배가 되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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