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과 식별의 기준 ‘경청’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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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매 순간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떤 이가 선인이고 악인인지,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이 올바른지 자문한다. 이러한 질문은 타인을 평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나의 판단이 언제나 옳을 수 없으며 때로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겸허한 성찰만이 우리를 진실의 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치관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얼마나 조건 없이 기여하고 있느냐는 실천적 지표로 증명된다. 그러나 욕망과 혼돈이 교차하는 현대 사회에서 명확한 식별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마르코 복음서 7장 14절과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군중을 불러 모으고 식별의 본질을 꿰뚫는 일침을 가하신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어지는 20절 이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이고 단호하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이토록 수많은 악한 것들이 외부의 유혹이 아닌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원리에 의해 판단하고 작용하기에 이토록 쉽게 더러워지는가. 그 해답의 열쇠는 예수의 첫 마디인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하느님은 우리에게 ‘경청(傾聽)’이라는 거룩한 초대를 건네신다. 이 경청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경청은 수동적인 침묵이 아니라 지극히 능동적인 영적 투쟁이다. 그것은 시대의 역사적 흐름과 교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낮고 외진 곳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응답하는 실천이다. 경청이란 인간의 진정한 결핍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억압받는 이들의 외침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경청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이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 나아가 자발적 희생을 기꺼이 수용하는 용기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근간이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선사하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경청의 가치를 상실할 때 내면은 곧바로 황폐해진다. 타자의 고통에 눈감고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해지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나쁜 생각’들이 고개를 든다. 부정한 방식의 한탕주의, 무한한 욕망의 사슬에 묶인 자본주의적 노예화는 우리가 경청하기를 멈춘 지점에서 시작된다. 내면의 소리에만 매몰되어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릴 때 인간은 식별의 능력을 잃고 탐욕의 포로가 된다. 식별을 가능하게 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는 힘은 결국 ‘경청’에서 나온다.
공감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인지적 시도라면 경청은 이해의 여부를 초월하여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한 인격이 실제로 내 앞에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존중이며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쌓아올린 견고한 고정관념을 뛰어넘게 하는 해방의 동력이다. 경청은 단지 조용히 듣는 행위를 넘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과 이웃의 진실에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 내면의 판단 작용은 정화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가두는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 사회에 기여하고 생명을 살리는 올바른 식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듣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고 깨닫는 자만이 비로소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란한 말의 잔치가 아니라 ‘거룩한 경청’의 회복이다.
마르코 복음서 7장 14절과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군중을 불러 모으고 식별의 본질을 꿰뚫는 일침을 가하신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어지는 20절 이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이고 단호하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경청은 수동적인 침묵이 아니라 지극히 능동적인 영적 투쟁이다. 그것은 시대의 역사적 흐름과 교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낮고 외진 곳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응답하는 실천이다. 경청이란 인간의 진정한 결핍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억압받는 이들의 외침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경청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이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 나아가 자발적 희생을 기꺼이 수용하는 용기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근간이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선사하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경청의 가치를 상실할 때 내면은 곧바로 황폐해진다. 타자의 고통에 눈감고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해지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나쁜 생각’들이 고개를 든다. 부정한 방식의 한탕주의, 무한한 욕망의 사슬에 묶인 자본주의적 노예화는 우리가 경청하기를 멈춘 지점에서 시작된다. 내면의 소리에만 매몰되어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릴 때 인간은 식별의 능력을 잃고 탐욕의 포로가 된다. 식별을 가능하게 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는 힘은 결국 ‘경청’에서 나온다.
공감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인지적 시도라면 경청은 이해의 여부를 초월하여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한 인격이 실제로 내 앞에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존중이며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쌓아올린 견고한 고정관념을 뛰어넘게 하는 해방의 동력이다. 경청은 단지 조용히 듣는 행위를 넘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과 이웃의 진실에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 내면의 판단 작용은 정화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가두는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 사회에 기여하고 생명을 살리는 올바른 식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듣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고 깨닫는 자만이 비로소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란한 말의 잔치가 아니라 ‘거룩한 경청’의 회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