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를 다시 마주하는 용기 -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6년 01월 30일(금) 08:00
2026년이라는 하얀 도화지를 받아 든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거창했던 새해 계획은 일상의 무게에 눌려 희미해졌고 우리 마음의 백지에는 이미 실패의 낙서들이 어지럽게 그어진 듯하다. 하지만 1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이 막막함과 자괴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내 힘으로 인생을 완벽하게 그려내야 한다는 창조의 고뇌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년 한 시상식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이찬혁의 ‘종말론’과 화사의 ‘Good Goodbye’는 이 막막한 시기를 지나가는 우리에게 뜻밖의 자유를 제안한다. 이찬혁은 종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내며 세상의 끝을 직시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해방감을 노래한다. 반면 화사는 이별이라는 인간적인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담담히 수용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한다.

이 두 아티스트가 보여주는 자유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나를 억누르는 세상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주어진 한계와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는 말씀처럼 참된 자유는 세상의 강박이라는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겪는 피로감도 이와 닮아 있다. 최근 유행하는 광고 문구 중 “피부가 좋으려면 피부가 좋아야지”라는 말은 우리에게 서늘한 깨달음을 준다. 피부가 좋아지려면 근본적인 건강이 회복되어야 하듯 신앙이 좋아지려면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가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이 좋아 보이게 만드는 주변의 노력에만 골몰하곤 한다. 기도의 분량이나 봉사의 횟수라는 화장품으로 영혼의 민낯을 가리려 애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나를 아는 것을 원하지 번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호세아 6:6, 새번역)”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형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수용하는 인격적 만남에 있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세운 계획을 관철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맡기는 용기에서 나온다. 이찬혁이 노래한 종말론적 자유는 세상의 집착을 끊어내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며, 화사가 보여준 성숙한 수용은 실패한 나의 모습조차 은혜 안에서 받아들이게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는 약속처럼 신앙은 하나님을 내 삶의 식탁으로 기꺼이 초대하고 수용하는 인격적 사귐 그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의 고뇌가 단순히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티스트가 백지 앞에서 고뇌하는 이유는 그 자유로운 공간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열망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1월 한 달간 겪은 시행착오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삶이라는 예술 작품을 빚어가는 과정 중의 거친 스케치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기를 재촉하시는 감독관이 아니라 우리가 고뇌하는 그 백지 옆에서 함께 붓을 잡고 기다리시는 동역자다. 우리의 연약함을 수용하고 그분의 전능함을 신뢰할 때 고뇌는 비로소 창조의 희열로 바뀐다.

1월 30일, 새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결코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내 의지로 가득 찼던 밑그림을 지우고 다시금 백지를 마주하자. 그리고 그 백지 위에 당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수용하자. 창조의 고뇌가 자유와 맞닿아 있듯 우리의 영적 갈등은 결국 더 깊은 은혜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남은 2026년,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일에 마음을 두자. 우리가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붓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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