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마음을 품고, 화살은 시간을 당긴다
굿모닝 예향 [남도 체험로드 광양-장도와 궁시]
금과 은·옥·먹감나무 등 다양한 재료 사용
고 박용기 장도장 이어 3대째 장도 전통 전승
광양궁시전수교육관서 궁시의 역사 한눈에
궁시장 보유자 고 김기 선생 아들이 맥 이어
2026년 01월 26일(월) 19:00
광양장도박물관 전시장.
광양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땅이 지켜온 문화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 시작으로 광양의 장도와 궁시를 통해 도시의 속살을 먼저 만난다. 장도와 궁시는 광양에서 이어져온 오래된 기술이다. 장도가 변하지 않는 마음을 품는 도구였다면, 궁시는 그 마음을 끝까지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왔다. 광양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을 따라가며 그 안에 깃든 삶의 태도를 들여다본다.

박종군(가운데) 광양장도장 보유자와 박건영(왼쪽)·박남중 이수자. <광양장도박물관 제공>
◇ 변하지 않는 마음을 품은 광양 장도

칼날에 새겨진 단 하나의 글자, ‘일편심(一片心)’. 평생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광양 장도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다.

장도는 누군가를 베기 위한 칼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몸에 지니던 칼이었다. 허리춤이나 주머니 끝에 달아 일상처럼 함께했던 이 작은 칼에는 조상들이 지키고자 했던 삶의 태도와 의지가 담겨 있다. 광양에서 장도를 만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의 전통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장도(粧刀)는 오래전부터 남녀 구분 없이 사용돼 왔다. 사대부는 물론 평민에 이르기까지 몸에 지니며 호신용이자 장신구로 활용했다. 장도는 무력을 상징하지 않았다. 절제와 단정함, 스스로를 지키는 마음의 표상이었다. 장도의 칼날과 칼집이 정교하고 화려해질수록 그 안에 담긴 정신 역시 더 단단해졌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광양은 장도의 전통이 뿌리내린 대표적인 지역이다. 철의 산지로 알려진 광양의 환경은 장도 제작에 유리했고 이곳에서 장도는 기술을 넘어 지역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 국가무형유산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이 있다. 그의 작업 세계는 1대인 고(故) 박용기 장도장에서 시작됐다. 선친은 장도의 전통을 지켜낸 인물로 1978년 국가무형유산 장도장으로 지정되며 광양 장도의 맥을 단단히 이어갔다.

박종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보유자가 됐다. 그는 칼날에 ‘일편심’이라는 글귀를 새기며 장도의 정신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장도에 깃든 마음은 함께 살아내며 익혀야 한다”는 그의 말은 전통 공예가 왜 전승돼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현재 광양에서는 3대로 이어지는 전승이 진행 중이다. 아내 정윤숙과 아들 박남중·건영 형제 등 이수자들이 작업실에서 망치질을 이어가며 장도의 기술과 정신을 함께 전수받고 있다.

광양 장도의 전통을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 광양읍 매천로에 자리한 광양 장도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완성된 장도뿐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사용된 공구와 작업대, 망치와 집게, 칼날이 함께 전시돼 있다. 장도를 만드는 일이 단순한 수공 작업이 아니라 수백 번의 담금질과 수천 번의 망치질을 거치는 인내의 과정임을 실감하게 한다. 장도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광양 장도는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묵직하다. 몸에 지녔던 작은 칼 하나에 평생의 마음을 새겼던 사람들, 그리고 그 마음을 오늘까지 이어온 장인들 덕분에 광양 장도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남도 무형유산 궁시장 보유자 김기 선생이 제작한 화살.
◇ 광양 궁시는 화살에서 시작된다

왼 손으로 활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화살을 끝까지 끌어당긴다. 화살을 당기는 손에는 힘보다 호흡이 먼저 실린다. 급하면 흔들리고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장 빗나간다.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멀리 날아간다. 사람들은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명중시켰는지를 보지만, 궁시에서 더 중요한 것은 쏘기 이전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궁시는 활(弓)과 화살(矢)을 일컫는 말이지만 이를 만드는 제작 기술과 전승 문화까지 포괄한다. 1986년 전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광양 궁시장은 단순한 무기 제작의 역사를 넘어 수련과 의례, 삶의 태도를 함께 담아온 전통이다.

광양읍 유당로에 자리한 광양궁시전수교육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간에 스며든 궁시의 역사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가 그려진 외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단번에 알려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시대별 화살의 변화, 화살촉의 재질과 형태, 활의 구조와 제작 원리가 차분하게 이어진다. 석촉에서 청동, 철촉으로 이어지는 화살촉의 흐름은 기술의 진화를 보여주지만,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멀리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히 도달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이다.

광양 궁시의 맥을 지켜온 인물은 전남도 무형유산 궁시장 보유자였던 김기 선생이다. 그는 평생을 활과 화살 제작에 바쳤고, 재료 선택부터 제작 과정 하나하나를 몸으로 축적한 장인이었다.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작업 사진과 연보는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하다.

대나무를 고르고, 말리고, 다듬고, 불에 달구고, 깎고, 맞추는 과정이 반복된다. 화살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120회가 넘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설명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무게로 다가온다.

김철호 광양 궁시 전승교육사가 대나무의 결을 확인하고 있다.
지난 2022년 김기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광양 궁시는 현재 아들 김철호 전승교육사가 그 맥을 잇고 있다. 광양 궁시전수교육관 관장이기도 한 그는 작업실과 전시 공간을 오가며 기술을 전하고, 궁시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은 궁시의 세계를 한눈에 정리해 보여준다. 활과 화살의 구조를 설명하는 전시물, 신기전과 신기전 화차를 다룬 자료, 조선시대 군사 기술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특히 신기전 전시는 궁시가 단순한 개인 무기가 아니라 집단적 기술 체계 안에서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

대나무 채취에서 시작해 건조, 불 작업, 다듬기, 깃 달기, 완성에 이르기까지 120회 이상의 손길이 가는 작업 사진들은 화살 한 자루에 담긴 시간을 고스란히 전한다.

광양궁시전수교육관은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가장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은 단연 활쏘기 체험이다. 체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궁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활을 잡고 화살을 얹는 순간 힘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게 된다.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세우지 않으면 화살은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체험 공간과 전시 공간, 작업실은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전통 기술을 보여주고, 설명하고,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하는 흐름이다.

/이보람·김대수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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