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말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바꾼다 - 배영준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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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장애인 인권활동가로 이 도시를 살아가고 있다. 이 두 정체성은 나에게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져 왔다. 사회는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과연 모두를 시민으로 전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내 삶의 많은 순간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기준과 마주하며 조정해 온 시간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이 어렵다고 판단되는지가 먼저 주어졌고, 그 판단은 언제나 개인의 가능성보다 사회가 상정한 시민의 모습에 근거해 내려졌다. 장애인의 삶은 늘 조건부였고, 가능성은 허락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나는 오랫동안이 기준이 왜 나의 삶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지 묻지 못한 채 살아왔다. 삶의 선택지와 참여의 범위는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만 나의 삶을 설명해야 했다.
정책과 제도는 흔히 보편을 말한다. 그러나 그 보편이 실제로 누구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기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동에 제약이 없고, 의사결정에 즉각 참여할 수 있는 삶이 기본값이 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삶은 예외가 되고, 추가 설명과 보완의 대상으로 남는다.
광주는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를 자처해 왔다. 이 이름은 오랜 역사와 시민들의 투쟁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민주와 인권이 선언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누가 시민으로 인정받는지, 누구의 삶이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지를 통해 일상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광주에는 장애인을 위한 제도와 예산, 정책이 존재한다. 겉으로 보면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을 직접 살아보면, 제도가 존재하는 것과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제도는 있지만, 선택은 제한되어 있고, 가능성은 여전히 조건부다.
정책의 성과는 숫자와 지표로 설명된다. 이용률과 집행률은 행정을 평가하는 데 유용하지만, 장애인이 어떤 선택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는지는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가능성을 넓히고, 누군가는 반복해서 자신의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여전히 많은 정책은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은 선의처럼 보이지만, 장애인을 시민이 아닌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고정한다. 무엇이 필요하고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장애인은 그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설득해야 한다.
공식적인 논의의 자리는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장애인의 말은 자주 요약된다. 이미 검토되었다는 설명 속에서 당사자의 경험은 참고 의견으로 밀려난다. 중요한 결정은 다른 곳에서 내려지고, 장애인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그래서 같은 요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라는 말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뒤로 미루는 선택이며, 현재의 배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기다림 속에서 장애인의 삶은 멈춰 서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 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사회는 언제나 누군가의 말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해진 삶은 질문이 되었고, 그 질문 앞에서 기준은 흔들렸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도 장애인 권리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보호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고 결정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복지는 출발선일 수는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장애인은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이 질문은 행정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를 묻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존중하기로 선택하는지에서 사회의 방향은 다시 정해질 것이다.
내 삶의 많은 순간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기준과 마주하며 조정해 온 시간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이 어렵다고 판단되는지가 먼저 주어졌고, 그 판단은 언제나 개인의 가능성보다 사회가 상정한 시민의 모습에 근거해 내려졌다. 장애인의 삶은 늘 조건부였고, 가능성은 허락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광주는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를 자처해 왔다. 이 이름은 오랜 역사와 시민들의 투쟁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민주와 인권이 선언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누가 시민으로 인정받는지, 누구의 삶이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지를 통해 일상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광주에는 장애인을 위한 제도와 예산, 정책이 존재한다. 겉으로 보면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을 직접 살아보면, 제도가 존재하는 것과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제도는 있지만, 선택은 제한되어 있고, 가능성은 여전히 조건부다.
정책의 성과는 숫자와 지표로 설명된다. 이용률과 집행률은 행정을 평가하는 데 유용하지만, 장애인이 어떤 선택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는지는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가능성을 넓히고, 누군가는 반복해서 자신의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여전히 많은 정책은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은 선의처럼 보이지만, 장애인을 시민이 아닌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고정한다. 무엇이 필요하고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장애인은 그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설득해야 한다.
공식적인 논의의 자리는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장애인의 말은 자주 요약된다. 이미 검토되었다는 설명 속에서 당사자의 경험은 참고 의견으로 밀려난다. 중요한 결정은 다른 곳에서 내려지고, 장애인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그래서 같은 요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라는 말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뒤로 미루는 선택이며, 현재의 배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기다림 속에서 장애인의 삶은 멈춰 서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 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사회는 언제나 누군가의 말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해진 삶은 질문이 되었고, 그 질문 앞에서 기준은 흔들렸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도 장애인 권리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보호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고 결정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복지는 출발선일 수는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장애인은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이 질문은 행정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를 묻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존중하기로 선택하는지에서 사회의 방향은 다시 정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