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
밀봉된 마음
김수현
2026년 01월 01일(목) 16:00
그림=임근재 작가 ▲조선대 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작가 초대전 ▲400여회 기획전 참여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 ▲전남도전 심사 ▲광주시전 운영 및 심사
이상하게 눈이 부셨다. 나는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고전 두 권을 들춰보았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어딘가 심상찮았다. 「구덩이」는 첫 문장부터 해고라는 단어가 튀어나왔고, 「안개」는 시작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깔루아밀크를 천천히 마시며 책장을 넘겼다. 쌉싸름한 밀크커피가 혀를 적신다. 만족스러운 혀와 달리 두 눈은 문장을 겉돌았다. 초점이 흔들려 문장 주변의 여백으로 자꾸 미끄러졌다. 진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듯 여백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누군가 그 안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들릴지도 몰랐다. 순간 감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실바를 찾은 건 이곳에 책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름난 신축 아파트 상가라 그런지 카페 분위기도 남달랐다.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의외로 조용한 편이었다. 모두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거나, 말없이 술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물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름 모를 싱그러운 관목들이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관상용치고는 꽤 큰 편이어서 마치 정원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했다. 카페 입구부터 홀까지 작고 네모난 회양목이 양쪽에 서있는 것도 독특했다. 그 사이를 지나야지만 책장에 닿을 수 있었다.

회색 장발을 느슨하게 묶은 사장은 분주했다. 사장은 천체망원경을 바로 옆 공원에 설치하고 관측과 촬영을 동시에 시작했다. 촬영된 영상은 카페 대형화면으로 송출되었다. 홀 중앙 벽면에 설치된 대형화면에는 덩그러니 보름달이 떠있었다. 송출된 화면은 꽤 선명해서 달 표면의 크레이터와 마리아가 뚜렷하게 보였다. 개기월식 이벤트였다. 개기식이 끝나는 새벽 세시까지 카페는 영업한다고 했다. 책에 집중할 수 없고 돌아갈 곳도 마땅찮은 나로서는 괜찮은 볼거리였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진동이 멈출 때까지 검은색 가방을 지켜봤다. 전화는 연달아 세 번이 오고 난 뒤에야 멈췄다. 승우일게 뻔했다. 매일 집에서 보는데도 불구하고 승우는 전화를 자주했다. 병원을 다녀온 뒤로 내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려들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일일이 확인시켜주기란 불가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책은 반년 동안이나 가방 속에 있었다.

「말테의 수기」는 첫 문장부터 죽음을 말한다. 시인 릴케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말테는 릴케 자신의 분신인 셈이다. 젊은 시인은 가난하지 않은 척 애쓰지만, 그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은 알고 있다. 낡은 펠트모자와 오버코트와 가죽구두는 누가 봐도 닳고 해졌으니까. 시인은 뭐라도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집을 나선다. 파리 곳곳에 떠도는 냄새를 감지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병자와 빈곤한 노동자들이 내뿜는 냄새를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지독한 냄새가 제 몸에서도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인은 좌절한다.

갑자기 쿵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뒤쪽 룸에서 여자가 나왔다. 긴 머리에 낯빛이 다소 창백한 여자였다. 여자는 베이지색 플레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낯이 창백한 건 조명 때문이었다. 여자는 취기가 도는지 볼이 발그레했고 열기를 한껏 품고 있었다. 여자가 나를 힐끔 보더니 대뜸 웃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놓인 플라토노프, 우나무노, 릴케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여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다소 불쾌했다. 그녀의 목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작고 균일한 흑갈색 구슬들이 줄줄이 엮여 있었다. 목걸이 끝에 달린 장식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십자가가 달린 묵주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살폈다. 왼손 검지에도 특정한 문양이 박힌 반지가 보였다. 역시 십자가였다. 여자는 회양목 사이를 지나 화장실 쪽으로 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가 살랑거렸다. 나는 끝까지 지켜봤다. 여자가 사라졌는데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어떤 죽음에 대해 말하려 한다. 말테가 목격한 숱한 죽음이 되살아났던, 어느 밤의 이야기다. 그래, 벌써 반년이 지났다.

나는 그 커플과 원룸건물 입구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몇 번 마주쳤었다. 전에 살던 원룸건물은 5층 필로티구조였고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나는 3층 오른쪽 끝에 있는 제법 넓은 투룸에 살았다. 옆집 303호에는 남자 혼자 살았고 가끔 여자친구가 찾아왔다. 대체로 옆집은 늘 조용했었다. 벽 너머로 들리는 소음을 통해 나는 옆집 남자를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일단 소리가 들리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일을 마치고 온 남자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싱크대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설거지하는 소리도 들렸다. 다만 목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사물이 움직이고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옆집이 원룸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다른 건 전무했다.

여자친구가 찾아올 때면 옆집은 유난히 소리가 다양해졌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옆집 커플은 가벼운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왔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웃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복도로 퍼져나갔다. 둘 다 적당히 통통한 체형이라 건강해보였다. 저체중에 사십이 되어가는 내 눈에는 그들이 젊고 활기차게 보였다. 두 사람 손에는 흰색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봉투는 꽤 묵직해보였는데, 아마 주말 동안 먹을 식음료였을 것이다.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살만한 것들은 주로 술이나 안주, 음료, 간편식, 컵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뭐 그런 것들.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는 윗집 소음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거구의 게임 유튜버인 윗집 남자가 걸을 때마다 천장이 울렸다. 그날 사건이 벌어지던 밤에도 아이템에 광분하며 내지르던 유튜버의 소리가 들렸다. 그날 옆집 커플은 평소처럼 먹고 마실 것들을 왕창 샀을 것이다. 그날은 남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그 양은 두 배였을 것이고. 성인 세 명이 원룸에 앉아 술을 마시기에는 협소할 게 분명했다.

자정을 넘겨 한 시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간간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낮은 톤은 옆집 남자의 술주정에 묻혔다. 옆집 남자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지껄여댔다. 부실한 벽을 통해 모든 소리가 흘러들었다. 인이어를 껴도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잠재우지 못했다. 술병이 구르는 소리가 나기까지 그들은 그저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에 불과했다. 나는 모로 누운 채 잔잔한 연주곡을 들었다. 인이어가 귀에 눌려 불편했다. 양쪽 귀에서 인이어를 빼고 블루투스를 껐다. 음악은 그대로 켜두었다. 그때 갑자기 옆집 남자가 소리쳤다.

“씨발, 좀 닥치라고!”

그 한마디가 내 귀를 관통했다. 이어 술병이 넘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가 충돌하는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옆집 남자가 벌떡 일어나 누군가를 가격한 듯했다. 일어날 것도 없이 몸을 기울여 손만 뻗어도 닿았을 것이다. 그곳은 협소하니까.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재빨리 복도로 뛰쳐나갔다. 곧이어 방 안에 있던 두 사람도 뒤따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당연히 그들이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급격한 추위에 얼어붙은 듯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살짝 열려 있던 안방 문틈으로 거실 전등 불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호흡관에 연결된 숨 줄기 같아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싸움은 비일비재하다고 되뇌었다. 곧 지나갈 바람이라고. 그러나 폐부 깊숙한 곳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오래전에 밀봉시킨 기억이 바람에 꿈틀거렸다.

잠시 뒤 건물 위쪽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내려간 줄만 알았던 그들은 위로 올라갔던 거였다. 옆집 남자가 소리쳤다.

“어떡해, 어떡해, 은수야! 은수야!”

파랗게 질린 목소리가 건물을 뒤덮었다. 좁은 복도와 좁은 문과 좁은 계단을 타고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옆집 남자는 은수를 애타게 불렀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내 몸을 옥죄었다. 현관에 이중문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이 건물은 5층까지 있었고, 아마 전 세대가 남자의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템에 돈질하며 제발, 제발거리는 윗집 유튜버도. 그리 떠들던 유튜버도 잠잠했다. 어디에서도 문이 열리거나 사람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건물 밖에서 짐승이 울부짖었을 뿐이다.

“은수야, 눈 좀 떠봐, 은수야!”

은수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남자가 미친 듯이 눈을 뜨라고 외쳐댔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을 껐다. 음악마저 비통해 들을 수 없었다. 새벽 두시였다. 3층 거실 창문으로 내다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야근중인 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받았다면, 처음부터, 한달음에 달려왔다면, 다른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밤, 윗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시끄러웠다. 윗집 거구와 남자 여럿이 게임 방송을 하는 모양이었다. 소리는 고스란히 아래로 전해졌다. 잠을 뒤척이던 승우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너무 재빨라서 나는 미처 잡지 못했다. 승우는 같은 게이머로써 지금까지 윗집 소음을 참았었다. 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승우가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나는 어렵지 않게 승우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승우는 험악한 얼굴로 거구에게 말할 것이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시끄럽게 하냐고. 덩치는 윗집 남자보다 작아도 승우는 어깨가 떡 벌어졌고 얼굴도 거칠었다. 거친 얼굴만큼이나 거침없었다. 나는 그 와중에 회색 내복을 입고 있는 그를 떠올렸다. 얼마 뒤 승우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이후부터 밤늦게 윗집에서 소란을 피우면 승우는 경찰에 신고했다.

또 어느 날이던가. 안방에서 창밖을 보던 승우가 갑자기 휴대폰으로 어딘가로 전화했다. “네, 옆집에 사다리가 놓여 있는데요. 전에는 없었는데요.” 나는 무슨 일이냐며 창가로 갔었다. 정말 옆집 벽을 따라 2층까지 기다란 철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도둑이 든 건 아닌 것 같은데, 공사를 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와보면 알겠지.” 승우는 그랬다. 자신의 감대로 움직였다. 얼마 뒤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승우는 네, 알겠습니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2층에 놓인 사다리는 내가 짐작한대로 였다. 세를 놓기 위해 공사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승우가 과하다 싶으면서도 그럴만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누군가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 손길은 절박할 테니까.

승우였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르기 전에, 옆집 현관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내복바지가 아닌 회색 추리닝 차림으로. 적어도 나처럼 비겁하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왼손으로 회양목 가지를 살짝 건드렸다. 손톱만한 연둣빛 잎사귀들이 가지 끝에 촘촘히 붙어 있다. 실바는 라틴어로 ‘숲’이었다. 숲을 구성하는 관목들이 사람들을 에워쌌다. 나는 숲 속에 떠 있는 달을 응시했다. 지구 그림자에 보름달이 조금씩 가려졌다. 크레이터는 운석이나 소행성 충돌로 생긴 원형 분화구였다. 나는 깊고 어두운 마리아를 한동안 응시했다. 내부에서 붉은 용암이 분출되어 굳어진 흔적, 라틴어로 ‘바다’라고 불렸다. 안팎으로 생긴 상처가 서서히 깎여나갔다. 회색머리 사장은 테이블오더 화면에 개기월식에 참고할만한 것들을 몇 가지 띄워두었다.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남자는 왼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수시로 확인했다. 그러다 한 번씩 창밖을 바라봤다. 책 한 권과 붉은 와인잔이 남자 앞에 놓여 있었다. 벌써 몇 잔이나 마신 듯 그의 몸은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책은 장식품에 불과하듯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붉은 와인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알바생이 원목 갈색 트레이에 레드와인 한 잔을 들고 왔다. 맞은편 테이블의 와인잔은 금세 비어 있었다. 알바생은 맞은편 테이블에 레드와인을 놓고 빈 잔을 가져갔다. 나는 핏빛을 띠는 와인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부재중 전화 5통. 지금부터 승우는 안달이 날 것이다. 나는 그의 숨이 헐떡거릴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을 셈이다. 테이블오더로 칵테일 한 잔을 더 시켰다. 어딘가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상가 학원일 것이다. 실바에는 어떤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음악이 사라진 공간에서 모든 소리는 여과되지 못한 채 파동을 일으켰다.

나는 잠시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친숙한 멜로디였다. 어릴 적 자주 흥얼거리곤 했던 동요였다. 그러다 문득 가짜 달이 아닌 진짜 달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각테이블이 앞으로 밀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앞 테이블 와인남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걸까, 실연을 당했나, 아니면 부모를 여읜 걸까. 별별 생각이 스쳤다. 나는 회양목을 피해 밖으로 나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화장실로 갔던 여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찬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나는 코트를 걸치지 않은 탓에 바들바들 떨었다. 코끝이 간질거리더니 기침이 터져 나왔고 콧물마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고 보름달을 좇았다. 어둠속에서 달은 한쪽이 구부러진 채 원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 뒤 서서히 밀려오는 두터운 구름에 달은 자취를 감췄다. 나는 구름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이 금세 얼어붙었다.

승우의 손은 따뜻하다. 그의 팔뚝은 단단하고 위팔 안쪽은 부드럽고 말랑했다. 그가 내 가슴을 조물거리 듯, 나는 그의 손을 잡거나 겨드랑에 손을 넣어 위팔 안쪽을 왼손으로 매만졌다. 반복적으로 만지면 피부가 벗겨질 것 같았지만 계속 만졌다. 승우는 한 번도 운전하는데 방해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서 계속 만졌고 다른 흥밋거리가 생기면 금세 손을 놨다. 한 번씩 싸울 때면 나는 팔을 잡을 수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언젠가 잠결에 어둠속에서 승우가 물었다. 너는 내 팔만 있으면 되냐고. 그 말을 듣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너는 내 가슴만 있으면 되겠네, 하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팔과 가슴만 둥둥 떠다니는 건 굉장히 이상하니까. 정말 묻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팔만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 팔이어도 되는 거냐고. 나는 맞받아쳤을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 젖가슴이어도 되는 거냐고.



여자가 뛰어내린 원룸건물은 둔중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앰뷸런스가 와서 여자를 실어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휴대폰을 보니 새벽 세시가 넘었다. 귓가에는 짐승소리가 여전했다. 안방에서 나와 불이 켜진 거실을 서성이며 창문을 노려봤다. 어떻게든 머리를 내밀어 창밖을 확인하고 싶었다. 뭐라도 보고 싶어서 거실 대신 세탁실이 있는 우측 베란다로 걸어갔다. 좁은 베란다 창가에 서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들은 오른쪽 골목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가로등 불빛에 두 사람이 드러난 순간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옆집 남자와 다른 한 남자였다. 그 순간 거실전등 불빛이 세탁실까지 비친다는 것을 알았다. 부들거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옆집에 불이 켜진 걸 봤을 것이다. 누가 사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평소 승우와 내가 일으켰던 소란도 벽을 통해 남자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는 옆집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벽 세시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이 몇이나 될 것인가. 다시 숨이 거칠어졌다. 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두 남자가 걸어오던 길가에는 낡은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흰색 타일이 조잡하게 붙여진 작은 단층건물.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는 건물이었다. 출입문 위 간판에 KCSI라고 쓰여 있는 곳. 나는 늘 궁금했었다. 왜 이런 골목에 과학수사대가 있는지. KCSI 로고가 박힌 스타렉스 차량이 좁은 도로를 오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두 남자는 그곳에서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인근 병원에서 오는 길일수도 있고.

누군가의 진술이 필요했다면, 그건 승우가 아닌 나였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승우에게 연락했다. 경찰은 1층에 주차된 말리부 차량에 있는 블랙박스에 대해 물었다. 승우는 묻는 말에 태연하게 답했다. 지켜보는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전날 밤, 승우의 차량은 공장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승우는 야근을 마치고 새벽 여섯 시쯤 원룸에 도착했다. 사건이 벌어진지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길가엔 검붉은 핏자국이 남았다. 핏자국은 거멓고 우둘투둘한 아스팔트에 눌러 붙어 말라갔다. 나는 힐끔거리며 피해 다녔다. 자살로 처리됐을 것이다. 과실치사도 상해치사도 아닌. 고작 이십대에 불과했다. 그 후 며칠간 비가 내렸다. 빗물에 씻긴 핏자국이 희미해질수록 그것은 내안으로 침투했다. 고요하고 적당히 어둠이 내리는 곳에 뿌리를 내렸다. 나는 서둘러 이사를 가야한다고 외쳤다.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다. 승우는 그런 나를 말없이 지켜봤다. 괜찮다는 말로 애써 위로하려 들지도 않았다. 볕에 그을린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지만 곧 지워졌다. 어떻게든 옆집에서 벗어나야 했다. 집주인은 계약기간 운운하며 말렸지만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전화기 너머로 알겠다는 말을 듣기까지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밖으로 나돌았다. 옆집에서 소리가 들려도 끔찍했고 들리지 않아도 끔찍했다. 윗집 게임 유튜버가 지껄이는 소리에 오히려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동안 문을 노려봤다. 집을 벗어나 하염없이 걸었다. 초여름의 습한 열기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가장 편한 서점으로 갔다. 대형쇼핑몰에 딸린 서점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창가에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앉았다. 시원한 공기에 땀을 식히며 자격증 공부를 했다. 옆에는 고전 네 권을 올려두었다. 볼펜을 들고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던 중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다른 용무를 보면 안 됩니다. 이 수험서도 가지고 온 것 같네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매니저를 빤히 올려다봤다. 늘 했었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옆에 있는 고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책을 사려고 하는데도 안 되나요.” 매니저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서점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두 발은 멈추지 않았다. 발바닥이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무작정 걸었다. 가방엔 책 한 권과 수험서가 들어 있었다. 매니저의 단호한 말투가 귓가에 맴돌았다.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차마 던지지 못하고 끈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걸어갔다.

거대한 신축 아파트 단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상가에는 하나둘 상점들이 입점했다. 나는 공인중개소 유리벽에 붙은 안내문들을 하나씩 살폈다. 얼마나 대출을 받아야 입주할 수 있는지. 일을 그만둔 지 세 달이 되어 생활비도 빠듯했다. 며칠 뒤에는 빌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사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상가 끝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암녹색 천막으로 둘러친 전면엔 ‘오픈 예정’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 안에서는 그라인더 갈리는 소리와 드릴과 공구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텅 빈 내부를 채우기 위해 구슬땀을 흘릴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더위를 피해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분식집이라도 들어갈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창 너머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분식을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린아이들과 부모들이 떠드는 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나는 걸음을 돌렸다. 따가운 볕에 한껏 달궈진 거리를 다시 걸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십자가가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 십자가가 거북스럽지 않아서, 일단 그곳으로 가볼까 싶었다. 성당은 고요할 것이다. 나는 십자가를 향해 가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상가로 돌아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김밥 두 줄 포장해주세요.”

실내 공기는 놀라울 만큼 차가웠다. 가게는 바깥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시설이 깔끔했다. 머리와 옷차림이 단정한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재잘거렸다. 부모들은 음식을 입안에 넣고 대화하느라 바빴다. 버튼을 누르듯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나는 출입문 앞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막지 않았다. 저들의 웃음이 전염되길 바랐다. 아이들의 싱그러움이 조금이라도 내 안에 뿌리내리길 바랐다.



나는 베란다 원목테이블에 앉아 말테의 수기를 펼쳤다. 빌라 4층에는 제법 널찍한 베란다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결치는 나무를 조용히 응시했다. 집 앞에는 나무가 무성한 동산이 있다. 엽록소가 사라진 뒤 나뭇잎은 점차 물들어갔다. 나는 현란하게 물든 나무가 아닌, 녹색을 유지하며 생육을 이어가는 가시나무를 관찰했다. 행인들은 가시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간혹 허리를 한껏 굽혀 도토리를 줍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거리를 보면서도 서서히 번져가는 붉은 잎을 의식했다. 핏물이 흩날리듯 공중에서 강렬한 빛이 내렸다. 반쯤 감긴 두 눈과 두툼한 입술과 긴 머리칼에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래, 여자는 조금 일찍 갔을 뿐이다. 그러니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처벌한다 해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커피 맛도 어쩐지 수상했다. 나는 이물질이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녹슨 물이 섞인 듯 입안이 텁텁했다. 쇳가루가 들어가기라도 한 걸까. 승우 작업복에는 미세한 쇳가루가 붙어 있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집안 어딘가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나무들이 계속 흔들렸다.

어떤 날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수상했다. 나는 눈살을 한껏 구기며 창밖을 내다봤다. 나무들이 계속 흔들렸다. 창문을 닫아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속닥거렸다. 나무가 사람처럼 말을 한단 말인가. 그걸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옆집이나 윗집에서 나는 소리일까. 이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가혹하다. 이상한 건 승우에게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돌아온 승우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귀를 기울였다. 윗집에서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나름 얌전한 아이라고. 이른 아침에 옆집에서 절구 찧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게도 아이 칭얼대는 소리와 절굿공이 소리가 들렸다. 승우는 여자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여자가 집 안팎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들을, 명확하진 않지만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소리를. 나는 서둘러 머리를 감고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했다.



앞 테이블의 와인남이 술에 취해 쓰러졌다. 와인잔이 넘어지며 테이블을 적셨고 붉은 와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사각테이블에 고꾸라진 채 잠들었다. 책과 휴대폰이 젖어버렸다. 바코드가 붙은 책이었다. 배상을 해야 할 텐데. 그때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와인에 흠뻑 젖은 채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대신 받아야할지 망설였다. 다행히 바테이블 안쪽에 있던 알바생이 급히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와인남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나는 술을 믿지 않았다. 평소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이렇게 마신 게 언제인지 가늠하지 못할 만큼. 술주정하는 자들을 지켜보는 것도 지겨웠다. 아버지도 매일 마셨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기어코 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면 무거운 입이 열렸고 모진 말들이 쏟아졌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마냥 좋았다. 그 시절에 아빠는 머리가 거멓고 훤칠했었다. 나는 아빠 옆에 가만히 앉아 손길을 기다렸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담배연기만 연신 뿜어댔다. 거실 창틀에는 솔담배와 88과 THIS가 번갈아가며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연기가 좋았다. 아빠가 뿜어내는 연기를 코와 입으로 연신 빨아들였다. 며칠 간 아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거실 창틀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어제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밤새 꿈나라에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나는 매번 두 구절을 빼먹고 불렀다. 지금도 무심코 노래를 부를 때가 있다. 술과 담배는 아버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지치지 않고 폭언을 해댔다. 아버지의 곡절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어머니는 안주를 준비하고, 식탁에 앉아 같은 말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 어머니도 한두 잔 술이 늘었다.

여전히 눈이 부셨다. 삼각형 마티니잔의 가는 스템을 잡고 연거푸 마셨더니 칵테일이 금세 사라졌다. 감각이 점차 무뎌졌다. 눈이 부셔서 견딜 수 없었다. 휴대폰은 종일 울려댔다. 진동이 멈추자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9통이라고 떴다. 이제 앞 테이블은 텅 비었다. 와인남은 이곳에 살 것이다. 멋진 상가가 딸린 신축아파트. 나는 왼손을 들어 머리를 움켜쥐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온갖 녹색이 어우러져 숲이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고야 말았다. 숲 속에 떠 있는 달을.

달은 지구 그림자에 가장 깊숙하게 들어갔다. 생전 처음 마주한 붉은 달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너는 거기에 있었구나. 검붉은 달을 노려봤다. 흐릿했던 소리가 일사분란하게 배열되며 선명하게 들렸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세포변이를 일으키듯 소리가 다르게 들리기도 했다.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야. 날을 벼른 듯 응집된 소리가 쏟아졌다. 인이어를 다급하게 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소리는 안팎으로 휘몰아쳤다. 속이 역류되듯 울렁거렸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느다란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뭔가를 붙잡으려했다. 나는 휘청거리며 회양목 사이를 지나갔다. 저 끝에 갈색 책장이 보였다.



승우는 한 벽면을 차지한 갈색 책장을 두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책장은 집만 달리할 뿐 언제나 거실에 있었다. 이사를 준비할 때마다 승우는 양손을 허리에 걸친 채 책을 처분할 방법을 궁리하곤 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칸마다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채우고 돌봤다. 서로의 자산을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린 알고 있었다.

승우는 모니터 세 대, 본체 두 대로 리니지 게임을 했다. 십년 넘게 리니지만 하는 정통파였다. NPC는 지칠 줄 모르고 아우성이다. 살려줘, 살려줘(소년 또는 아이), 만나서 반가워요(소녀 또는 여성), 캐릭터가 위험합니다, 캐릭터가 위험합니다(남성), 물약이 떨어졌습니다(남성). 승우는 침침한 거실에서 모니터 세 대가 발산하는 빛 속에 앉아 있었다. 한때는 혈맹을 이끌던 군주였고 꽤 큰돈을 만졌던 시절도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거실에서는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침실 문을 닫았다.

한 번씩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탁한 두 눈이 나의 동태를 분주히 살폈다. 나는 원목책상에 앉아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책을 봤다. 한낮에도 햇볕은 희박했다. 앞산은 짙푸른 녹음을 제공하는 대신 볕을 앗아갔다. 여전히 겉도는 책을 붙잡고 방문을 힐끔거렸다. 승우는 문을 느슨하게 닫은 채 제자리로 갔다. 승우를 구성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밀려왔다. 나는 밀려드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방문을 닫았다.



어떤 시간은 밀봉되어 눈을 감으면 돌아가 버린다.

원룸건물은 열악했지만 일조량만큼은 부족함이 없었다. 한날의 우리가 그곳에 있다. 그 한날은 대낮이었고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거실에 있던 사물들이 모두 깨어나 저를 봐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갈색 책장, 컴퓨터, 빈 술병, 엔틱 전등, 엔틱 벽시계 위로 먼지가 수북했다. 조잡한 하늘색 서큘레이터도 거실에 있었다.

승우는 낮부터 안방에서 술을 마셨다. 하얀 접이식 밥상에는 마트에서 사온 광어회가 절반쯤 남아있었다. 소주는 두 병째였다. 그는 마땅한 일이 없어 한동안 쉬고 있었다. 나는 건설회사에 다닌 지 세 달이 되었다. 건설회사라서 남직원들이 많았다. 한창 바쁜 시즌이라 회사에서 밥을 시켜먹고 야근을 했다. 열 시를 넘겨 자정이 되도록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회사차를 타고 귀가했다. 지친 몸으로 귀가하면 승우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날이 한동안 이어졌다.

두 번째 소주가 바닥을 보일 때였다. 소주잔은 언제나 하나였다. 술을 마셔야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 승우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이날은 부쩍 말수가 적었다. 말 대신 얼굴과 눈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비웃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리 뜸을 들이나. 나는 승우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래서 좋냐, 좋아?” “뭐?” “그래서 좋냐고.” “무슨 소리야 대체.” 그 순간 승우가 갑자기 왼팔을 뻗어 내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머리채를 잡고 거실로 끌고 나갔다. 안방에서 끌려 나가는 동안, 시간은 부유하듯 느려지더니 갑자기 내달렸다. 승우는 머리채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놔, 이거 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승우는 놓지 않았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렇게 남자가 좋냐고! 어!” 승우가 소리치며 머리채를 놨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한 짐승을 봤다. 주먹을 움켜쥐고 외쳤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승우가 주먹을 날릴 듯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승우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때리기만 해봐, 그럼 끝장이야.”

승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승우는 내 눈을 피했다.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하늘색 서큘레이터를 집어 던졌다. 그가 이 집으로 들어올 때 들고 온 거였다. 서큘레이터는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비싼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는 손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부숴도 될 만한 물건을 고른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런 다음 승우는 주먹으로 안방 문을 내리쳤다. 문이 움푹 들어갔다. 주먹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그가 현관으로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노려봤다.



누군가가 내 팔을 만지고 있었다. 눈을 슬쩍 떴다. 실바를 찾아 낸 승우가 내 팔을 주물었다. 팔을 주무르며 한 번씩 왼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보곤 했다. 악몽을 꿀 때마다 승우는 내 팔을 다독이고 양팔을 번갈아가며 주물러주었다. 강도를 조절해가며 내가 다시 잠들기까지 매번 그랬다. 나는 엎드린 채 그런 승우를 지켜봤다. 그는 와인남보다 볼품없고 심지어 나이든 사장만도 못했다. 그는 쇳가루와 땀 냄새가 밴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염색도 소홀한 탓에 옆머리에 흰머리가 성성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대형화면에 떠 있는 달을 봤다. 지구 그림자가 이탈하면서 깎여나간 달이 다시 재생되었다. 핏빛을 띠던 달은 점차 은빛을 발산했다.

“왜 그래, 괜찮아?” 승우가 왼손을 펴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나는 승우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푹 꺼진 눈에 고단함이 배어 있었다. 흰자위는 실핏줄이 얽혀있고 까만 동공은 조용히 열렸다가 수축되었다. 꿈속에서 앞차와 시비가 붙었다. 앞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운전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승우도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렸다. 중년의 얍삽한 얼굴을 한 남자가 승우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두 사람을 에워쌌다. 나는 차안에서 그 상황을 지켜봤다. 앞차 운전자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행동은 침착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본 듯한 몸놀림이었다. 얼굴 윤곽은 흐릿했는데 이상하게 눈빛만은 강렬했다. 나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 얍삽한 남자가 외투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남자는 흉기를 손에 들고 승우를 끌어안았다. 승우는 움찔하더니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굳게 닫혀있던 입이 벌어졌고 두 눈이 기이하게 커지더니 초점을 잃어갔다. 나는 사색이 된 채 망설였다. 밖으로 나가야 할 지 문을 잠거야 할지. 욱신거리는 명치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거렸다.

승우는 차디찬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체온을 전해주었다. 눈빛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다정했고 급기야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흉기를 쥔 남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왼손으로 책 한 권을 꽉 쥐고서 다시 승우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살기를 띄지도 부리부리하지도 않았다. 맑지도 눈이 부시지도 않았다. 흐릿한 눈에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가소로웠다. 나는 피식 웃으며 책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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