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정선 시인
2025년 12월 22일(월) 0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갖고 되뇌는 말이 있다. 시인 선배가 지향하는 ‘무관심, 무계획, 무책임’이다. 3무(無)라…… 끌렸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잘 사는 방법이지 싶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혹은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서 아니면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던 시간들. 내 가슴은 굳어 갔고 뇌는 푸석푸석해졌다.

지금은 망가진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여기에 ‘무신경’을 보태어 4무(無)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일종의 도피성 방어기제일까?

무관심, 애정이 없거나 방임하는 상태.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해 관심을 쏟으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감정 소비도 많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일을 추진하다 보면 되레 뒤통수를 맞을 때도 있다.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스트레스와 관심이 소용없다고 느낄 때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다가도 무관심하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지닌다. 하지만 지나친 관심은 부담스럽다. 무관심하면 인간관계가 저절로 정리가 되고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관심은 그저 가슴속에 소중한 일기장처럼 간직하고 진심이 어린 ‘따뜻한 무관심’으로 응원하자.

무계획의 날들은 유동적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듯이 일상생활도 이쪽저쪽으로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그래야 곪지 않고 악취가 나지 않는다. 무계획 속에는 여유가 있고 낭만도 깃든다. 나를 옥죄는 실패, 좌절, 절망이라는 거머리 같은 단어들이 멀어진다. 계획 속에는 복병이 숨어 있다. 주말인 오늘도 남편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스키 타다 다친 친구가 입원해서 약속이 무산되고 다음 주에 예정된 출장이 갑자기 내일로 당겨졌다. 계획은 어긋나야 제맛, 인생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것이 인생인가.

무책임한 사람은 신간(身幹)이 편하다. 어떤 일을 벌이면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잡지 편집 일을 하다가 접었고, 내 역할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책임질 일이 줄어드니 두통과 과민성 복통이 사라지고, 웃음과 유머가 생겼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남을 배려하다가 오히려 욕먹고 손해 보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면 책임질 일을 회피하게 된다. 인쇄 직전까지 원고가 늦은들, 아무 연락 없이 약속 시간에 늦은들, 듣기 불편한 농담인들 어떠랴, ‘천하태평’에 넉살 좋은 사람들이 부럽다.

무신경, 감각이나 느낌 따위가 매우 둔함. 이것은 내게 절실했다. 내 몸에는 촉수가 많다. 그동안 겪은 일들이 다사다난해서 그럴까.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들이 내 예민과 심각의 그물에 걸린다. 뇌도 속일 수 있고, 감정도 습관이라 연습하면 고쳐진다. 요즘엔 ‘괜찮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면서 스스로 다독인다. 탁구를 칠 때는 일부러 깔깔거리며 심각한 일도 가볍게 띄운다. 복잡함으로부터 벗어나 단순해지고 싶어서다. 어느덧 사람들은 내가 얼굴이 밝고 명랑해서 좋다고 한다. 더욱 신경이 무뎌지도록 불필요한 촉수를 잘라내고, 감성의 창고인 가슴을 덤덤하게 단련시켜야 한다. 그래야 뇌에 평화가 오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테니까.

4무(無)는 내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방패이자 조력자다. 그동안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방치하고 강하게만 만들려고 혹사시킨 것 같다. 나만의 사각 벽을 만들어 놓고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면 절대 안 돼라고 수없이 명령하며 살았던 것. 세상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무너지다가도 잘 돌아가는데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내보내고 강과 바다와 숲을 만났다. 덜 괴롭고 덜 힘든 것들과 좀 더 즐거운 것들을 좇았다. 가슴이 메마르고 피폐해지지 않으려고. 이내 내 세상도 부풀고 넓어졌다. 자연 속에서 난 부자다. 이제는 그 사각 벽도 점점 낡고 틈이 생겨 그 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숨이 편안해지는 행복한 바보가 되었다. 나 홀로 쓸쓸하면 어떤가, 돈이 좀 부족하면 어떤가, 누가 나를 무식하다고 흉본들 어떤가.

내 세상은 작지만 포근하고 온연하다. 바람에 흔들리다가 말(言)들의 채찍에 맞다가 허공에 소리치다가 버거울 때 가끔씩 계획 없이 무책임하게, 조금은 무관심하고 무신경하게 책장 넘기듯 하루를 산뜻하게 넘겨 보자. 격랑의 파도가 잦아들어 삶이 보사노바 리듬을 타도록.

“네, 그래도 되지요. 그렇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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