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달콤함 뒤 ‘야만의 역사’ 파헤치다
설탕의 역사-이성규 지음
2025년 12월 05일(금) 00:00
“인도인들은 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단맛을 냅니다.”

BC 327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인도 원정에 나선 네아르쿠스 장군은 현지에서 접한 ‘설탕’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달콤한 갈대(Sweet Reed)’라고 불렸던 설탕은 이후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간다. 귀하고 값비싼 약재이자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문화와 결합하며 인류 최초의 ‘세계 상품’이 됐다. 인류에게 설탕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등 인류 문명사를 뒤흔든 설탕의 ‘달콤함’ 뒤에는 흑인 노예들의 삶을 담보로 한 야만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성규 부산 MBC PD가 펴낸 ‘설탕의 세계사’는 동명의 4부작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인문교양서다. 2년간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하와이, 자메이카, 쿠바, 영국 등 10개국을 찾아 설탕이 어떻게 세계를 움직여왔는가 추적한 다큐는 제52회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 영화 버전으로 재편집돼 부산푸드필름페스티벌 등에서 상영됐다. 다큐를 기반으로 한 책인만큼 생생한 현장 취재와 세계적인 음식 역사학자 아이반 데이 등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설탕의 빛과 그림자를 자본, 제국, 노예, 해적, 이주, 문화가 얽힌 세계사로 설명한 책은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한국인의 시선’으로 풀어낸 설탕의 문명사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구를 중심으로 한 설탕의 장대한 역사를 풀어나감과 동시에 설탕에 얽힌 한국의 하와이 이민사, 한국의 기업사까지 함께 소개한다.

책은 설탕의 제국을 설명하기 위해 상징적인 세 주역을 언급한다. 거실에서 차와 함께 설탕의 단맛을 음미하는 설탕 농장주 젠틀맨,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팔려간 1000만명에 달하는 노예, 지배와 억압으로 나뉜 시대에 반기를 들고 지배와 착취 시스템에 균열을 낸 저항의 상징 해적이 그들이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과 노동자들의 모습. <우물이 있는 집 제공>
설탕은 산업혁명, 식민지 개척, 노예무역, 세계 경제의 재편까지 인류사를 흔든 결정적 동력이었다. 영국 산업 혁명의 자본은 공장이 아닌,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됐고 일본 메이지 유신의 재정 기반의 배후에는 사탕수수와 설탕 산업이 있었다. ‘반도체의 상징’이 된 삼성 역시 1953년 제일제당을 세우고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한 설탕 사업이 그룹의 기반이 됐다.

‘폭력과 수탈’이라는 제국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노예들의 삶과 저항은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국가 취재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힌 노예들이 걸어가야 했던 카리브해 연안 국가 바베이도스의 ‘노예의 길’, 탈주 노예들의 마을 ‘마룬’, 저항을 담은 무술 ‘카포에이라’, 레게 음악 등이다. 더불어 카리브해 15개 국가들이 조직을 구성, 서구 국가들이 노예들을 이용한 설탕무역으로 축적한 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배상을 요구한 이른바 ‘설탕소송’도 소개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사진 한장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후 하와이로 떠나야했던 ‘사진 신부’ 이야기는 아픈 대한민국의 현대사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하와이의 여성들은 1908년 신명부인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며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조선의 독립운동은 지원했고 이들이 하와이에서 만든 독립선언서는 지금까지 전해진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 불평등, 이주 노동자와 글로벌 공급망 문제 등 설탕이 만들어낸 폐해는 지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저자는 “설탕의 역사는 우리에게 착취와 폭력 그리고 획일성이 지배해온 야만의 역사를 보여준다”며 “설탕 알갱이 한 알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착취와 폭력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물이 있는 집·2만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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