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스며든다] 삶의 질 지향 ‘공동체 돌봄’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 연다
(14) 수용·격리 넘어 공존으로 -광주형 치매마을이 해법이다
환자들, 정든 집 떠나 요양병원 내몰리고
가족들, ‘간병 파산’ 위기 앞 속수무책
선진형 치매마을 모델로 새로운 해법 모색
4~6명 집에서 공동체 생활 ‘유니트 케어’
로봇이 말동무 하고 센서로 낙상·배회 탐지
마을 전체를 거대한 ‘치매 안전지대’ 설계
2025년 12월 02일(화) 08:20
스마트 헬스케어 기술 중 하나인 건강관리 밴드로 심박·수면·활동량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AI 생성이미지>
전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광주·전남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훌쩍 넘어서며 치매 환자 역시 가파르게 늘고 있지만 지역사회의 대비태세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환자들은 정든 집을 떠나 요양병원으로 내몰리고 가족들은 ‘간병 파산’의 위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이러한 지역의 절박한 현실 속에서 단순한 수용을 넘어 지역사회 내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해법, ‘광주형 치매마을’ 조성이 추진되고 있어 주목된다.

광주도시공사는 최근 치매 환자와 고령자가 지역사회 내에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광주형 치매마을 조성사업’을 기획하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 검토에 착수했다.

이는 기존 지자체 주도의 ‘치매안심마을’이 현판만 내건 보여주기식 행정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실질적인 주거와 돌봄, 의료가 결합된 ‘원스톱 통합돌봄 단지’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 ‘무늬만 안심마을’… 하드웨어가 없다= 현재 광주시와 전남도는 치매 친화적 환경 조성을 목표로 다수의 ‘치매안심마을’을 지정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현장의 실상은 열악하다. 대부분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을 거점으로 일회성 예방 교육이나 노래 교실을 운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광주·전남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이 ‘치매 파트너’로 참여해 환자를 돌보는 의미 있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공간’의 부재다. 치매 증상이 악화되거나 가족의 돌봄이 어려워질 경우 환자가 머물 수 있는 물리적 주거 기반이 마을 내에 전무하다.

현재의 안심마을 시스템에서는 배회하는 노인을 발견해 집으로 모셔다드리는 정도의 소극적 대응만 가능할 뿐이다. 결국 환자들은 정든 이웃을 떠나 요양병원이나 시설이라는 ‘섬’으로 격리될 수밖에 없다.

익숙한 환경에서 분리된 환자들은 인지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안심’이라는 간판은 있지만 정작 환자와 가족이 안심하고 삶을 의탁할 ‘집’은 없는 것이 광주·전남의 현주소다.

AI가 자녀 얼굴과 목소리를 형상화해 안심마을에 거주하는 부모와 대화하고 있다. <AI 생성이미지>
◇ 광주도시공사의 해법, ‘집’에서 시작하는 돌봄= 광주도시공사가 구상하는 ‘광주형 치매마을’은 이러한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이 프로젝트의 비전은 ‘나만의 속도와 일상을 지키는 포괄적 돌봄, 광주 온(ON)빛 마루’다. 핵심은 시설이 아닌 ‘집’이다.

광주형 치매마을은 기존의 대규모 집단 수용 시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치매 노인 4~6명이 한 집에서 가정을 이루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유니트 케어(Unit Care)’ 방식을 도입한다.

개인의 방은 별도로 두어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장하되 거실과 주방을 공유하며 사회적 고립을 막는 구조다. 이는 유럽과 일본 등 복지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된 주거 모델로, 환자들은 관리의 대상이 아닌 생활의 주체로서 일상을 영위하게 된다.

마을 전체는 거대한 ‘치매 안전지대’로 설계된다.

환자들은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 내 조성된 산책로와 커뮤니티 공간, 상점 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배회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마을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환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신체 기능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이는 본보가 기획 시리즈를 통해 소개했던 일본의 ‘요리아이’나 네덜란드의 ‘호그베이크’ 모델을 한국, 특히 광주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광주형 치매마을’ 산책로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르신이 간병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AI 생성이미지>
◇ 1인 가구·경증 환자 위한 사회적 안전망= 이번 사업안은 광주·전남에서 급증하는 ‘1인 치매 가구’ 문제의 유력한 대안으로도 꼽힌다.

치매 환자 가구 형태 중 1인 가구는 52.6%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배우자나 자녀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독거 치매 노인에게 병원이 아닌 ‘가정형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복지를 넘어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다.

경제적 효과 또한 뚜렷하다. 치매 환자 1인당 연간 관리 비용을 분석한 결과 요양시설 및 병원에 입소할 경우 3138만원에 달하는 비용이 소요되지만 지역사회에 거주하며 돌봄을 받을 경우 1733만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광주형 치매마을을 통해 초기부터 맞춤형 돌봄을 제공하고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춘다면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국가와 지자체의 막대한 재정 부담까지 획기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급증을 우려하는 광주시의 재정 건전성 측면에서도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일본 오사카부 토요나카시 지역공생홈 ‘남성 간병인 모임’ 리더 토야 토모타카(70)씨가 시설 앞에서 인사를 전하고 있다. /박연수 기자 training@kwangju.co.kr
◇ AI 기술과 인권 존중 철학의 결합 = 광주형 치매마을은 단순한 주거 단지를 넘어 첨단 기술과 인간 존중 철학이 융합된 미래형 돌봄 모델을 지향한다.

우선 광주가 보유한 풍부한 AI 및 헬스케어 인프라가 이 마을에 전면 도입된다.

광주도시공사는 헬스케어와 AI 기술을 접목한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조선대 광주치매코호트연구단 등 지역 연구기관이 개발 중인 ‘AI 닥터’와 스마트 케어 기술이 마을 곳곳에 적용될 예정인 것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환자의 말동무가 되어 정서적 안정을 돕고 곳곳에 설치된 스마트 센서는 낙상이나 배회 등 응급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지해 부족한 돌봄 인력을 보완한다. 약 복용 시간을 알려주고 인지 강화 훈련을 돕는 기술은 환자의 자립 생활을 가능케 하는 핵심 도구다.

하지만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공사는 사업의 핵심 가치로 ‘인권 존중’과 ‘자율적 행동 지원’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다.

기존 요양병원이 환자를 침대에 묶어두거나 약물로 통제하는 ‘관리’ 중심이었다면 치매마을은 환자가 스스로 식사 메뉴를 고르고 빨래를 개고 화초를 가꾸는 ‘일상’을 최대한 지지한다.

일본 후쿠오카의 ‘치매 프렌들리 센터’나 네덜란드의 ‘호그베이크’에서 보여준 ‘휴머니튜드(인간 중심)’ 케어가 광주의 토양 위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는 치매 환자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잔존 능력을 가진 인격체’로 대우한다는 점에서 돌봄 철학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전남 치매안심마을인 순천시 서면 판교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이 “치매야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 /박연수 기자 training@kwangju.co.kr
◇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열린 마을’로 =성공적인 조성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있다.

부지 확보와 예산 마련, 그리고 무엇보다 님비(NIMBY)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주민 설득 과정이 필수적이다.

치매마을이 또 다른 고립된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개방형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마을 내 카페나 공원, 도서관 등 편의 시설을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주민들이 자원봉사자나 ‘치매 파트너’로 참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서는 의료·돌봄·복지 서비스가 끊김 없이 이어지는 통합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

입주자가 중증으로 진행됐을 때 연계할 수 있는 전문 의료기관과의 협약, 그리고 마을 내 상주하는 전문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광주시와 도시공사는 사업 초기 단계부터 의료계, 학계, 그리고 지역 주민과 거버넌스를 구축해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치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노화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낯선 병실 천장이 아니라 익숙한 이웃의 얼굴을 보며 늙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가 시민에게 제공해야 할 마지막 복지라는 것이다.

광주도시공사 관계자는 “치매는 격리가 아닌 사회 구성원 그대로 생활해야 하는 문제”라며 “이번 광주형 치매마을 조성 계획이 단순히 시설을 짓는 공사가 아니라 치매 환자와 가족, 지역사회가 함께 행복한 동행을 시작하는 마중물이 되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끝>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764631200792685385
프린트 시간 : 2025년 12월 06일 04: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