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사라진 도시의 끝 - 윤희철 한국지속가능발전센터 센터장
2025년 12월 01일(월) 00:20
도시계획의 세계에서 한 이름이 신화처럼 회자된다.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정규 교육을 받은 도시계획가도, 정부 관료도 아니었던 그녀는 1961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한 권으로 세계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뉴욕의 재개발 계획에 맞서 거리의 삶과 골목의 생태를 옹호했고 도시는 ‘사람이 사는 유기체’라는 관점을 확립했다. 그녀의 사상은 이후 수십 년간 도시정책과 커뮤니티 디자인, 도시재생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몇 해 전 전 세계 도시계획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현대 도시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힌 사람도 제이콥스였다.

그녀의 저서 ‘자연에서 배우는 경제(The Nature of Economies)’는 도시를 넘어 경제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이해하는 놀라운 확장을 보여준다. 제이콥스에 따르면 경제든 도시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다양성, 순환, 적응, 공생이 없다면 결국 붕괴한다.

광주는 지난 20년간 도시의 외연을 끊임없이 넓혀왔다. 주택 공급률은 높아졌고 하늘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제이콥스의 말대로 이것은 ‘발전(Development)’이 아니라 단순한 ‘확장(Expansion)’에 불과하다. 발전이란 새로운 일을 낳고 다른 요소를 연결하며 스스로 진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고층 아파트는 서로 닮은 형태로만 솟아오르고 도시의 창의적 분화는 멈췄다. 도시는 커졌지만 다양성은 줄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사라졌다.

제이콥스는 “살아 있는 경제는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했다. 그러나 광주의 아파트 단지는 지역 내부의 순환을 끊는다. 건설 자본은 외부에서 들어오고 생활 소비는 대형 유통망으로 빠져나가며 에너지와 식품은 외부에 의존한다. 지역 안에서 생산된 것이 다시 지역의 삶을 지탱하는 ‘자기공급’ 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한때 골목과 시장이 이 도시의 순환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사람과 돈과 정이 도시 안에서 돌았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는 그 순환을 멈춘 ‘폐쇄된 생태계’다.

도시의 회복력은 다양성에서 온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살아갈 때 도시는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광주의 신도시는 ‘다양성의 죽음’을 보여준다. 소득 수준이 비슷한 주민, 유사한 직업, 동일한 생활 패턴이 벽 안에 모여 산다. 거리는 깔끔해졌지만 우연한 만남과 예측할 수 없는 대화는 사라졌다. 제이콥스가 말했듯 다양성을 잃은 생태계는 언제나 붕괴한다. 광주의 하늘이 높아질수록 도시의 내부는 점점 더 무너지고 있다.

경제가 생명체처럼 작동한다면 그 생명은 경쟁과 공생의 균형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광주의 주거정책은 ‘경쟁’만을 강조해왔다. 분양가 경쟁, 브랜드 경쟁, 고급화 경쟁. 진정한 적합성은 자신이 속한 환경을 유지시키는 능력인데 지금의 아파트는 주변 생태를 고립시키고 지역의 공생을 약화시킨다. 살아남은 건물만 남고 그 안의 관계와 공동체는 사라졌다. ‘살아남는 도시’보다 ‘함께 살아남는 도시’가 필요한 이유다.

도시계획은 정밀해졌고 그만큼 삶은 예측 가능해졌다. 놀이터는 놀이터로만 공원은 공원으로만 기능한다. 사람들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걷고 정해진 방식으로만 만난다. 제이콥스는 “예측 가능한 경제는 이미 죽은 경제”라고 했다. 불확실성과 즉흥성, 실험과 실패의 여지가 사라진 도시는 살아 있지 않다. 광주의 고층 아파트는 완벽하게 설계되었지만 그 안에는 자발적인 변화의 틈이 없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된 공간은 결국 생명이 머물 수 없는 곳이다.

도시는 원래 생명체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불완전함 속에서 진화하고 서로 부딪히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뜻이다. 광주의 고층 아파트는 인간의 편의를 극대화한 건축물이지만 생명의 질서에는 맞지 않는다. 이 도시에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건물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다.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실험할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도시, 그곳에서만 진짜 발전이 시작된다.

지금 광주의 아파트는 완벽하다. 하지만 완벽한 도시는 살아 있지 않다. 도시의 복잡성은 혼란이 아니다. 제이콥스는 도시를 ‘조직된 복잡성(organized complexity)’이라 불렀다.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공간, 누구나 개입할 수 있는 여백이 있을 때 도시는 다시 살아난다. 골목 한가운데 카페가 생기고 공터에서 장터가 열리며 미조성된 공원에 시민들이 나무를 심고 오래된 건물의 1층이 예술가의 작업실이 되는 순간, 도시는 다시 스스로 에너지를 만든다.

광주가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공간들이다. 계획되지 않은 가능성, 그것이 도시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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