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loser)에 담긴 편견 - 황옥주 수필가
2025년 11월 19일(수) 00:20
인생이 윷놀이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윷짝을 든 사람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던지지만 떨어지는 윷짝은 나는 모르쇠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바닥에 펼쳐진 윷짝대로 눈금을 쓸 수밖에 없다. 인생이 그렇다.

친구의 조카 되는 보험사 여직원이 있어 나를 삼촌이라 불렀다. 40을 넘긴 조카가 안타까운 듯 친구는 내게 중매를 바랐으나 당사자가 적극 싫다는데 난들 도리가 없었다.

그간 친구는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2년쯤 됐었다. 혼잡한 롯데백화점에서 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삼촌!”하고 부른다. 잊어져가던 그녀다. 15년 넘은 ‘해후’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기에 너무 놀랐다. 말 대접삼아 “어떤 상대면 좋겠느냐?”니까 독신자는 언감생심, 미혼 자녀가 없고 키만 크면 된단다. 땅바닥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윷짝 그림이다.

처음 조건은 이해가 되는데 다음이 또 생뚱맞다. 왜 키가 커야하는지 되묻자 자기가 너무 작아 작은 사람끼리 같이 다니기가 뭐할 것 같아서란다. 부부동행이 무슨 자랑을 위한 시위인가.

나이 든 사람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오래 전 어느 중앙지에 ‘키도 경쟁력’이라는 ‘붉은 글씨’의 기사가 있었다. 남자 180㎝가 못되면 ‘루저’라는 한 여대생의 말로 한때 설왕설래가 많았다.

‘loser’는 실패자, 패배자, 분실자, 심지어 전과자, 유죄 확정자라 영어사전에 나와 있다. 경마 경주의 실패 말(馬)도 루저라 한단다. 우리말 샘에도 ‘말이나 행동, 외모가 볼품없고 능력과 재력도 부족하여 어디를 가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란 풀이도 있다. 모두다 부정적인 해석뿐이다. 학문과 지성을 탐해야할 대학생 사고치고는 유치하고 한심스럽다 생각했다. 두들겨보지 않아도 텅 비어 있을 그 머릿속이 그려져 쓴 웃음을 지었었다.

TV에선 본 동아프리카 마사이 족은 대단한 장신이다. 남수단의 딩카족은 더 크단다. 큰 키가 인생의 성공이라면 그들은 선 채로 과일을 딸 수 있는 것 말고 우리보다 뭐든 잘하고 앞서가야 옳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키가 작아 할 일을 못했다는 글은 보질 못했다. 키가 커서 존경받았다는 말도 듣질 못했다. 오히려 키 작은 사람들이 남긴 역사적 사실들은 많다.

우리나라에도 키는 작아도 위인으로 추앙받은 인물들이 많았다. 강감찬, 정충신, 전봉준과 오리대감 이원익 등이다. 특히 이원익은 왜란이 일어날 징조가 있어 선조가 인물을 구하자 승정원에서 추천한 인물이다. 왜소한데다 너무 허약하여 왕께 인삼 3근만 하사해 주십사 청하여 건강을 도왔다. 며칠 후 알현한 이원익을 본 선조는 “공연히 인삼 세 근만 버렸군!” 했다니 옹졸하고 의심, 질투심 많은 사람이 인재를 바로 알아봤을 턱이 없다. 나중에 인정을 받아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맡았던 분이 오리대감이다.

최근 모 신문에 ‘키 크는 주사’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처방 162만 건, 부작용 1809건으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 자연스러움이 훨씬 낫다는 얘기다. 이런 사고 틀에 굳어져버린 나는 중매자로서는 영 아니다. 중매에는 교언영색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배지는 밖에서 봐도 번쩍거린다. 사람다운 사람의 지혜와 인격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해가 뜨면 달은 자리를 내 놓는다. 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꿈을 설계하고 실현하는 데 루저라고 뭐가 흠이 되랴!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763479200792155131
프린트 시간 : 2025년 11월 19일 13: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