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와 그 수장은 없어야-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중국의 고장극(古裝劇)에 등장하는 귀족과 고관대작의 집 대문에는 성씨와 함께 적힌 부(府)라는 현판이 붙여져 있다. 예컨대 범(范) 씨라면 범부(范府)라는 현판이 붙는다. 반면에 하급관리의 집에는 성씨와 함께 택(宅)이 붙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府)는 “높고 큰 집”이다. 연좌제가 엄중하게 적용되기에 부(府)나 택(宅)이든 간에 한집안 내지 한통속으로서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얽혀있었다.
오늘날의 삼권분립체계에서 3권을 분류하는 추상적인 단위로 입법부와 행정부에 상응해서 대법원과 각급 법원을 아우르는 전체 사법조직을 통틀어서 편의상 ‘사법부’라고 부르는 건 그렇다고 치자. 참고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는 그냥 입법, 행정 및 사법으로만 지칭된다. 같은 한자어권인 일본과 대만에서도 사법부(司法府)라는 용어는 확인되지만 우리처럼 사용빈도가 많지 않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법부라는 용어가 권력분립에 따른 분류상의 추상적인 표현일 뿐이지 실체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에는 사법부는 물론이고 ‘사법부의 수장’ 표현까지 자주 회자된다. 일본과 대만에서 최고법원의 장(長)은 그 지위에서 때로 사법기구 전체를 대표하지만 수장(首長)이라는 표현은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미국 법조계에서는 연방대법원장의 지위를 두고서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primus inter pares)’, 즉 “동료들 중 첫째”라고 부른다. 이 표현에는 다른 동료 대법관들과 동등하다는 데에 방점이 놓여있다. 우리의 경우에 헌법재판소장과 국회의장이 이와 같다. 헌법재판소장은 헌법재판관이면서 소장직을 맡고 있기에 “동료들 중 첫째”가 맞다.
하지만 우리 대법원장은 대법관들과 같은 동료가 아니다. 대법원의 장(長)일 뿐만 아니라 법원행정처를 통해 모든 사법행정까지도 사실상 통할한다. 즉 대법원장이 판사를 임명하고 대법관과 일부 헌법재판관 임명에도 제청권과 지명권을 행사한다. 이러하니 “동료들 중 첫째”를 훌쩍 뛰어넘어서 ‘수장’이라는 표현이 그리 과장된 말은 아니다.
이 대법원장이 행여나 심지가 굳어서 법원 내외부로부터의 부당한 인사 간섭과 재판 개입을 배제하면서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지켜내는 방파제의 역할을 떠맡는다면, 이 제도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2017년에 공개된 당시 김영훈 판사의 내부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판사들의 87%가 대법원장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불이익을 염려하고, 47%가 상급심에 반하는 판결을 하는 경우에 인사 등의 불이익을 염려한다고 답했다. 또한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사태에서 재판거래 혐의와 함께 다른 재판에 개입한 고위직 판사를 상대로 탄핵소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 판결도 논란으로 불거져있다.
심급제도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대법원과 각급 법원들 간에 동위관계가 보장되는데도, 사법부라는 큰 집안에서 승진 및 전보의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는 수장, 즉 제왕적 대법원장이 존재하는 가운데 개별 법관들의 재판상 독립이 때로 위협받아왔다. 그래서 이 같은 사법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사법부가 마치 성역(聖域)처럼 기타 권력으로부터 독립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서 정작 개별 법관들은 독립적이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이 사법부의 수장이라는 게 전무후무한 표현은 아니다. 나치불법국가에서 히틀러는 수상, 대통령 및 민족의 영도자 지위를 모두 가졌는데 여기에다 사법의 최고 수장(Oberster Gerichtsherr)까지도 겸했었다. 이 게리히츠헤어(Gerichtsherr)는 독일에서 과거에 각 지역의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 내에서 독립적인 사법권을 행사했던 이른바 ‘영주재판제도(Patrimonialgerichtsbarkeit)’상의 지위였는데 이게 히틀러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
설령 사법부의 수장이라도 권한과 함께 응당 책임을 져야하는 게 대의제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오늘날의 국민주권주의와 권력분립원리 하에서 사법의 독립성이 결코 내외부의 비판에서 벗어나 있는 성역을 뜻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불거진 여러 논란에서 확인되듯이 이제는 법관의 재판상 독립, 즉 진정한 사법권 독립을 위해서라도 사법부의 수장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대법원장은 대법관들과 같은 동료가 아니다. 대법원의 장(長)일 뿐만 아니라 법원행정처를 통해 모든 사법행정까지도 사실상 통할한다. 즉 대법원장이 판사를 임명하고 대법관과 일부 헌법재판관 임명에도 제청권과 지명권을 행사한다. 이러하니 “동료들 중 첫째”를 훌쩍 뛰어넘어서 ‘수장’이라는 표현이 그리 과장된 말은 아니다.
이 대법원장이 행여나 심지가 굳어서 법원 내외부로부터의 부당한 인사 간섭과 재판 개입을 배제하면서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지켜내는 방파제의 역할을 떠맡는다면, 이 제도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2017년에 공개된 당시 김영훈 판사의 내부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판사들의 87%가 대법원장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불이익을 염려하고, 47%가 상급심에 반하는 판결을 하는 경우에 인사 등의 불이익을 염려한다고 답했다. 또한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사태에서 재판거래 혐의와 함께 다른 재판에 개입한 고위직 판사를 상대로 탄핵소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 판결도 논란으로 불거져있다.
심급제도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대법원과 각급 법원들 간에 동위관계가 보장되는데도, 사법부라는 큰 집안에서 승진 및 전보의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는 수장, 즉 제왕적 대법원장이 존재하는 가운데 개별 법관들의 재판상 독립이 때로 위협받아왔다. 그래서 이 같은 사법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사법부가 마치 성역(聖域)처럼 기타 권력으로부터 독립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서 정작 개별 법관들은 독립적이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이 사법부의 수장이라는 게 전무후무한 표현은 아니다. 나치불법국가에서 히틀러는 수상, 대통령 및 민족의 영도자 지위를 모두 가졌는데 여기에다 사법의 최고 수장(Oberster Gerichtsherr)까지도 겸했었다. 이 게리히츠헤어(Gerichtsherr)는 독일에서 과거에 각 지역의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 내에서 독립적인 사법권을 행사했던 이른바 ‘영주재판제도(Patrimonialgerichtsbarkeit)’상의 지위였는데 이게 히틀러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
설령 사법부의 수장이라도 권한과 함께 응당 책임을 져야하는 게 대의제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오늘날의 국민주권주의와 권력분립원리 하에서 사법의 독립성이 결코 내외부의 비판에서 벗어나 있는 성역을 뜻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불거진 여러 논란에서 확인되듯이 이제는 법관의 재판상 독립, 즉 진정한 사법권 독립을 위해서라도 사법부의 수장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