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건축기행] 낙동강 품은 두개의 성당…100년 시간을 잇는 ‘거룩한 대화’
<45> 밀양 명례성지
‘성모승천성당’ 1896년 설립 경남 최초 본당
태풍 피해로 세번의 건축…한국적 절충 양식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건축가 승효상 설계
자연과 지형에 순응…반 지하의 모습 ‘겸손’
인공조명 절제해 어둠을 밝히는 ‘빛’ 의도
두 성당 잇는 길 ‘순례자의 체험’ 상징
‘성모승천성당’ 1896년 설립 경남 최초 본당
태풍 피해로 세번의 건축…한국적 절충 양식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건축가 승효상 설계
자연과 지형에 순응…반 지하의 모습 ‘겸손’
인공조명 절제해 어둠을 밝히는 ‘빛’ 의도
두 성당 잇는 길 ‘순례자의 체험’ 상징
![]() 수령 300년을 넘긴 팽나무 아래에 자리한 성모승천성당 주변으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과 낙동강이 어우려져 보인다. |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 풀어준다 해도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
1866년 병인박해, 밀양의 소금 장수 신석복(마르코)이 체포되며 남긴 이 말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무게를 증언한다.
그의 생가터가 내려다보이는 낙동강 700리 물길 중 가장 유력한 굽이 밀양 하남읍 ‘밝은 예절의 마을’ 명례에 명례성지가 자리한다. 이곳은 단순한 종교적 순례지를 넘어선다. 1896년 경남 최초로 세워진 천주교 본당의 역사적 터전이자, 100년이 넘는 시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건축물이 하나의 풍경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건축적 성지’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한옥 성당이 ‘시간의 증거’로 서 있다면, 새 기념성당은 그 ‘기억의 번역’으로 응답한다.
◇시간을 견딘 기적, ‘성모승천성당’= 성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것은 언덕 중턱, 350년 된 팽나무 그늘 아래 단아하게 자리한 ‘성모승천성당’이다. 이 작은 한옥 건물은 그 존재 자체로 한국 천주교회의 수난과 적응, 그리고 기적의 역사를 웅변한다.
명례성당의 역사는 두 번의 ‘전파’와 세 번의 ‘건립’으로 요약된다. 1896년 6월 10일,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가 지금의 ‘십자가의 길’ 12~13처 부근, 강을 바라보는 곳에 경남 최초의 본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성당은 태풍으로 전파됐다. 이후 1928년, 신자들은 힘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200석 규모의 장대한 기와집 성당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36년 불어닥친 두 번째 태풍은 이 성당마저 무참히 파괴했다. 성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딱 이 성모님만 그대로 안 부서지고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현재의 건물은 1938년, 절망 속에서도 신앙을 놓지 않은 교우들이 그 태풍의 잔해와 목재를 하나하나 수습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성모상을 중심으로 본래의 규모보다 작게 ‘축소 복원’한 세 번째 성당이다. 이 때문에 이 성당의 건축 구조는 매우 특별하다. 현장 사진에서 확인되듯, 내부는 서양식 ‘바실리카’가 아닌, 서까래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한옥 목조 구조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단을 중심으로 공간이 나뉘고, 중앙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 신자의 자리를 구분하던 목조 기둥(인방)이 열을 지어 서 있다. 또한 제대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성모상을 모신 것 역시 “원래 이렇게 제대 가운데 성모님을 두면 안 되”지만, 성모님이 성당을 지켜주셨다는 신자들의 마음이 반영된 예외적 배치다.
서양의 전례가 이 땅의 건축 양식, 유교적 관습, 그리고 기적의 이야기와 만나 탄생한,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한국적 절충 양식’의 건축물인 셈이다.
◇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건축가, 승효상= 옛 성당이 ‘시간의 기록’이라면, 새롭게 자리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은 ‘땅의 기억’을 현대 건축의 언어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설계는 ‘빈자의 미학’으로 알려진 건축가 승효상이 맡았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순교자의 거룩한 터에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자체가 지닌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곳을 ‘성서적 풍경’으로 명명했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지형에 순응하여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철학은 새 기념성당의 배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새 성당은 언덕의 주인공인 옛 성당을 압도하거나 조망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몸을 낮춰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을 파고들어, 절반쯤 땅에 묻힌 ‘반 지하’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자리한다. 기존의 축대를 허물지 않고 ‘송판 무늬가 거칠게 찍힌 노출 콘크리트’ 벽체로 감싸 안아, 건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에 밀착된다.
이 독특한 설계는 건축가와 당시 성지 조성을 담당한 이재민 신부의 깊은 공감대 속에서 탄생했다. 흥미로운 점은 건축가가 개신교 장로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성당 내부에 십자가상은 있으되 예수의 형상(성상)이 없는 등, 가톨릭 전례의 ‘보편 타당성’과는 다른 파격이 시도됐다. 성지 관계자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어느 성당에 가도 문을 딱 열면 제대가 정중앙에”있지만 “우리는 골방처럼 들어가잖아요” 이 비대칭적이고 미로 같은 동선 자체가 방문객에게 정형화된 순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는 구도의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녹는 소금’의 상징, 빛으로 빚은 공간= 명례성지 새 성당, 일명 ‘소금 성전’의 건축 언어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녹는 소금’이다. 이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삶 그 자체에서 가져온 상징이다. 그는 ‘누룩과 소금 행상’을 하던 소금 장수였다. 스스로를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소금처럼,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다. 건축가는 이 ‘녹는 소금’이라는 순교의 형상을 ‘빛’으로 치환했다. 성당 지붕이자 야외 제단 광장 바닥에는, 마치 소금 결정을 흩뿌려 놓은 듯한 12개의 사각 조형물이 솟아있다. 이는 12사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성전 내부로 빛을 끌어들이는 천창이다. 육중한 문을 밀고 성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은 완전한 어둠과 마주한다. 인공조명을 극도로 절제한 공간, 스테인드글라스 하나 없는 거친 콘크리트 벽 속에서, 시선은 천창에서 스며든 빛줄기들에 집중된다.
본래 이곳의 빛은 어둠 속에서 겨우 길을 밝히는 가늘고 여린 ‘녹아내리는 빛’을 의도했다. 성지 관계자 설명처럼 “시간별로…쫙 들어오니까 자연 채광 자체가 아름답고 건축 미학적으로 뛰어나”게 계획된 것이다. 다만, 독특한 천창 구조는 누수 문제를 야기했고, 방수 공사를 거치며 채광은 대부분 차단된 상태다. 침묵 속에 앉아 빛을 기다리는 그 행위 자체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는 과정이 되도록, 가장 비물질적인 재료인 ‘빛’을 통해 가장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길로 완성되는 ‘성서적 풍경’= 명례성지는 단일 건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승효상은 성당 벽면에 걸리던 ‘십자가의 길 14처’를 성지 전체를 회유하며 걷는 ‘공간화된 순례길’로 풀어냈다. 본래의 거대한 구상은 코로나19 등 현실적 문제로 일부 중단되었지만, 현재의 동선만으로도 건축가의 의도는 충분히 읽힌다. 본래 계획은 “물탱크가... 예수님의 마지막 무덤”이 되고, 그곳까지 이르는 순환의 그 길을 통해 비움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현재 방문객의 여정은 옛 성당에서 시작된다. 100년의 시간을 묵상한 뒤, 언덕을 오르면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순교자탑과 마주한다. 그리고 순교자의 얼굴과 포구나무를 형상화한 ‘순교자 두상’을 지나, 순교자의 생가터를 거쳐 다시 새 성당의 낮은 입구로 향한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벽에 뚫린 네모난 창들은 낙동강의 풍경을 빌려오는 장치가 된다.
결국 명례성지에서 건축은 웅변하는 조형물이 아니다. 100년 전의 한옥 성당은 ‘시간’과 ‘기적’을, 새 기념성당은 ‘땅’과 ‘빛’을, 그리고 이 둘을 잇는 ‘길’은 순례자의 ‘체험’을 상징한다. 이 모든 요소가 낙동강이라는 대자연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이곳은 건축을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성서적 풍경’으로 완성된다. 건축이 어떻게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고, 인간의 영성을 고양시키는지 명례성지는 묵직한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경남신문=박준영 기자 ·사진=김승권 기자
1866년 병인박해, 밀양의 소금 장수 신석복(마르코)이 체포되며 남긴 이 말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무게를 증언한다.
그의 생가터가 내려다보이는 낙동강 700리 물길 중 가장 유력한 굽이 밀양 하남읍 ‘밝은 예절의 마을’ 명례에 명례성지가 자리한다. 이곳은 단순한 종교적 순례지를 넘어선다. 1896년 경남 최초로 세워진 천주교 본당의 역사적 터전이자, 100년이 넘는 시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건축물이 하나의 풍경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건축적 성지’이기 때문이다.
![]() 밀양 명례성지에 자리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은 2018년 건축가 승효상 설계로 봉헌된 현대 건축물이다. |
현재의 건물은 1938년, 절망 속에서도 신앙을 놓지 않은 교우들이 그 태풍의 잔해와 목재를 하나하나 수습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성모상을 중심으로 본래의 규모보다 작게 ‘축소 복원’한 세 번째 성당이다. 이 때문에 이 성당의 건축 구조는 매우 특별하다. 현장 사진에서 확인되듯, 내부는 서양식 ‘바실리카’가 아닌, 서까래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한옥 목조 구조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단을 중심으로 공간이 나뉘고, 중앙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 신자의 자리를 구분하던 목조 기둥(인방)이 열을 지어 서 있다. 또한 제대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성모상을 모신 것 역시 “원래 이렇게 제대 가운데 성모님을 두면 안 되”지만, 성모님이 성당을 지켜주셨다는 신자들의 마음이 반영된 예외적 배치다.
서양의 전례가 이 땅의 건축 양식, 유교적 관습, 그리고 기적의 이야기와 만나 탄생한,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한국적 절충 양식’의 건축물인 셈이다.
![]() 밀양 명례성지내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내부. 땅속으로 스며드는 소금 형상의 채광창이 내부를 비추고 있다. |
이러한 철학은 새 기념성당의 배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새 성당은 언덕의 주인공인 옛 성당을 압도하거나 조망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몸을 낮춰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을 파고들어, 절반쯤 땅에 묻힌 ‘반 지하’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자리한다. 기존의 축대를 허물지 않고 ‘송판 무늬가 거칠게 찍힌 노출 콘크리트’ 벽체로 감싸 안아, 건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에 밀착된다.
이 독특한 설계는 건축가와 당시 성지 조성을 담당한 이재민 신부의 깊은 공감대 속에서 탄생했다. 흥미로운 점은 건축가가 개신교 장로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성당 내부에 십자가상은 있으되 예수의 형상(성상)이 없는 등, 가톨릭 전례의 ‘보편 타당성’과는 다른 파격이 시도됐다. 성지 관계자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어느 성당에 가도 문을 딱 열면 제대가 정중앙에”있지만 “우리는 골방처럼 들어가잖아요” 이 비대칭적이고 미로 같은 동선 자체가 방문객에게 정형화된 순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는 구도의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 성모승천성당 내부에는 남녀 신자가 구분되어 앉았던 칸막이 형식의 좌석 구조가 남아 있다. |
본래 이곳의 빛은 어둠 속에서 겨우 길을 밝히는 가늘고 여린 ‘녹아내리는 빛’을 의도했다. 성지 관계자 설명처럼 “시간별로…쫙 들어오니까 자연 채광 자체가 아름답고 건축 미학적으로 뛰어나”게 계획된 것이다. 다만, 독특한 천창 구조는 누수 문제를 야기했고, 방수 공사를 거치며 채광은 대부분 차단된 상태다. 침묵 속에 앉아 빛을 기다리는 그 행위 자체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는 과정이 되도록, 가장 비물질적인 재료인 ‘빛’을 통해 가장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 순교자이자 소금장수였던 신석복 마르코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소금’의 의미와 자연 채광을 담아 설계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
현재 방문객의 여정은 옛 성당에서 시작된다. 100년의 시간을 묵상한 뒤, 언덕을 오르면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순교자탑과 마주한다. 그리고 순교자의 얼굴과 포구나무를 형상화한 ‘순교자 두상’을 지나, 순교자의 생가터를 거쳐 다시 새 성당의 낮은 입구로 향한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벽에 뚫린 네모난 창들은 낙동강의 풍경을 빌려오는 장치가 된다.
결국 명례성지에서 건축은 웅변하는 조형물이 아니다. 100년 전의 한옥 성당은 ‘시간’과 ‘기적’을, 새 기념성당은 ‘땅’과 ‘빛’을, 그리고 이 둘을 잇는 ‘길’은 순례자의 ‘체험’을 상징한다. 이 모든 요소가 낙동강이라는 대자연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이곳은 건축을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성서적 풍경’으로 완성된다. 건축이 어떻게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고, 인간의 영성을 고양시키는지 명례성지는 묵직한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경남신문=박준영 기자 ·사진=김승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