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푸른 밤의 축제- 김 향 남 수필가
2025년 10월 02일(목) 00:20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 속담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오곡이 무르익어 창고마다 곡식이 쌓이고, 산과 들에 과실이 풍성하게 열리는 계절적 충만에 대한 노래이며, 동시에 인간의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다.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넉넉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시간, 그것을 우리는 ‘한가위’라 부른다.

‘한가위’라는 말의 기원 속에는 인간이 달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오래된 기억이 숨어 있다. 고대사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차오르는 만월은 어둠을 밝히는 고마운 존재였다. 맹수나 적의 위협을 분간하기 어려운 깊은 밤에도 달빛은 사람들에게 안도와 기쁨을 주었다. 만월은 자연스레 축제의 시간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환한 달이 뜨는 8월 보름은 으뜸가는 명절로 자리 잡았다.

신라 시대, 여인들은 음력 7월 보름부터 8월 보름까지 두 패로 나뉘어 길쌈을 겨루었다. 두 달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베를 짜며 정성을 다해 마지막 승부를 갈랐다. 이긴 편은 축제를 주관하고 진 편은 음식을 장만해 함께 즐겼다. 경쟁이 곧 축제의 서막이 되었지만 승패가 갈려도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날이 바로 한가위 날이었다.

달은 신성한 등불이자 시간의 표식이었다. 둥근 달이 하늘에 걸리면 인간은 둥근 원을 그리며 그 빛을 몸에 새겼다. 여인들은 달빛 아래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를 추었다. 원을 그리며 돌고 노래하며 뛰는 몸짓은 마치 달의 모양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춤 이상의 춤, 인간이 우주의 질서와 어깨를 맞대는 제의이며 축제였다. 달과 인간,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는 한밤의 축제는 지금도 우리의 무의식 깊숙이에서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 것이다.

한가위의 또 다른 풍습은 달맞이다. 사람들은 마을 어귀의 언덕이나 뒷산에 올라 둥근 달을 맞이하며 소원을 빌었다. 가을걷이가 무사히 이루어지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대를 거슬러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둥근 달은 그 소원을 받아 안는 거대한 그릇이었다. 하늘에 차오른 크고 환한 달에 마음을 비추는 순간,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어떤 것과도 무한히 맞닿을 수 있었다.

한가위는 늘 달과 함께 이어져 왔지만 그것은 역사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달밤이 있었다. 사춘기의 어느 해, 전화도 드물고 교통도 불편하던 시절이었다. 그 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득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얼굴이, 내가 몰래 상상하던 순간과 꼭 닮은 표정으로 달빛 속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이 그랬듯 그도 그러했을,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동구 밖, 들판에는 벼이삭이 노랗게 익어가고, 그 위로 희고 푸른 달빛이 담뿍 쏟아졌다. 그 애가 타고 온 자전거, 머리에 쓴 교모 위에도 달빛이 부드럽게 번졌다. 그 사이로 겨우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갔을 뿐이다. 그러나 말보다 더 무수한 것들이 이미 달빛 속에 스며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작은 영혼들의 서성임은 지금도 환히 빛난다. 그 밤의 달빛은 말 없는 마음을 대신해 오래도록 빛나 주었다.

인간의 삶은 결핍을 향한 끝없는 운동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모자란 것들을 채우려 애쓰고 빈 마음을 메우려 꿈을 꾼다. 그러나 한가위 달밤은 예외적인 순간이다. 그날의 달은 결핍이 아닌 충만, 갈등이 아닌 화해, 단절이 아닌 연결의 상징이었다. 풍요와 완성, 순간과 영원, 사랑과 그리움을 동시에 품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온전한 충만함이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원무를 추며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마음을 꽉 채워 주었던 것처럼, 달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 하나의 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시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 더 높고 푸른, 더 넉넉하고 풍요로운 명절을 위해 하늘의 달도 열심히 제 소임을 다하는 중이다. 마치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날마다 조금씩 늘리고 부풀리며 그날을 기약하고 있다. 어둠을 밝히는 오래된 등불로, 결핍을 넘어 충만으로, 시간과 영원을 잇는 가장 순결한 약속으로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다.

그 약속의 밤, 크고 환한 달빛 아래 모두가 함빡 웃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너와 나, 우리가 만나는, 달빛 푸른 밤의 축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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