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이루지 못한 꿈의 간수 -괴테의 ‘나우시카아’
2025년 10월 02일(목) 00:20
11년 궁정생활 끝에 매우 절박해진, 오래된 소망을 좇아 괴테는 “마흔이 되기 전에 공부 좀 해야겠다”고 이탈리아로 달려갔고, 2년을 머물며, 본인이 제2의 탄생으로 부를 만큼 많은 경험을 하고 배웠다. 이탈리아 본토의 끝, 나폴리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용암이 흐르는 베수비오 화산에 세 차례나 올랐으나, 시칠리아행만은 많은 망설임 끝에 결행한다. 당시에는 매우 모험적인 여정이었다. 바다 위에서만 나흘 길. 심한 뱃멀미를 하며 갔다.

망망대해를 체험하고, 마침내 시칠리아의 풍경을 보자 괴테가 처음 한 일의 하나가, 서점으로 달려가서 ‘오디세이’를 산 것이었다. 이탈리아어일 수밖에 없는 그 책을 동행했던 화가 친구에게 번역해가며 읽어주려고 말이다. 여러 문화가 교차했고, 특히 고대 그리스의 정복지로서 그리스적 면모가 선명했던 시칠리아의 풍광, 자주 험준한 바위 해안들을 보며 어려서부터 친숙한 긴 유랑의 이야기 ‘오디세이’의 무대가 바로 거기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바로 그 현장인 것 같은 곳에서 그 장려한 서사를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던 것.

시칠리아를 가로 질러 가 닿은, 아름다운 해안 중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타오르미나의 바닷가, 고대 그리스 극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괴테는 거목 오렌지 나무 위에 올라 앉아 ‘오디세이’를 나름으로 압축하는 극작품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한다. 한 친구에게 읽어주며 나누는 것으로 부족했던 듯 ‘오디세이’를 자기 글로 전해 볼 생각이었다. 긴 서사시에서 괴테가 눈 여겨 본 부분은 오디세우스의 긴 유랑이 마감되고 고대하던 귀향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변곡점. 그렇게 해서 취해진 소재가 나우시카아이다.

나우시카아는 빨래놀이를 나온 공주로 빨래를 마치고 공놀이를 하다가 부서진 난파선처럼 벌거숭이로 해안에 쓸려 와 있는 오디세우스를 발견하고 빨래한 옷을 그에게 입힌다. 그러나 궁으로 돌아가면서는 사려 깊게도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여 그 낯선 남자를 마차에 태우지는 않고 수레를 뒤따라 걸어오게 한다. 오디세우스는 그가 궁정에 와 닿자 왕도 첫눈에 사위 삼고 싶어하는 출중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거절하며 귀향을 도와 달라고 한다. 그럼에도 왕은 후한 대접을 하며 연회를 베풀고 경기를 연다. 경기에서는 그의 용맹함이, 연회에서는 오디세우스 자신이 들려주는 기나긴 모험담, 그 고난의 오디세이 이야기가 펼쳐진다.(융숭한 후대와 환송으로 그 페아키아인들의 땅의 묘사는 서구문학의 최초의 유토피아의 기술로 일컬어진다.)

오디세우스는 떠나고 나우시카아는 남는다. 원작 ‘오디세이’에서 그녀는 주인공 급의 인물은 아니어서 특별한 성격의 부각이 없다. 그런데 괴테는, 이방인이 도착함으로써 일어나는 ‘여성적 정서의 동요’에 주목하여(쉴러에의 편지 1798.2.14) 나우시카아의 심리를 조명하는 비극을 한 편 써보려 했다. 그러나 과욕이었던 듯 오래 붙들고 있었건만 시작만 해놓고 별로 진척되지는 못했다. 또 호메로스가 쉽사리 그만한 격조로 압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긴 서사시의 핵심 부분을 붙들었다. 시칠리아를 떠나 다시 나폴리로 돌아오며, 또다시 나흘간 뱃멀미에 시달리며, 험한 물목 ‘스킬라와카립디스’도 지나며, 괴테는 작품의 상세한 구상을 기록해 두었다. 미완성 작품은 무엇보다 착목한 지점이 놀랍고, ‘이탈리아 기행’에다 기록해놓은 그 상세한 구상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오디세이’를 다시 펴게 만든다.

‘파우스트’에야 60년을 매달렸지만 괴테라 한들 무슨 수로 꿈이며 계획을 다 이루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남겨진 꿈의 편린 만으로도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절실하게 나누고 싶던 마음이 전해지고, 또 남은 것이, 흔적이어도, 매우 크고 아름다운 것을 가리키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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