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민주주의, 평화, 법치- 주윤정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2025년 08월 19일(화) 00:00
인도네시아에서 맞는 해방 80주년, 벅찬 마음이다. 아체의 평화 20주년 기념 국제 평화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하기 위해 와서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침 인도네시아도 해방 80주년을 맞아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다.

인도네시아 국제선 입국장에서 도착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서양인 남자가 짜증을 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만 오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당신들 백인이 약탈해 세운 나라에 갈 때마다 늘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긴 비행에 지쳐 참았다. 독립하지 못했다면 굴종과 굴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했고 우리는 당당하게 꿈을 펼치고 산다.

최근 해외에 오면 한국은 태평성대라는 생각을 한다. 지난달 모로코 세계사회학회에서 만난 레바논, 이란, 우크라이나 학자들로부터 공습과 폭격으로 친구, 친지, 이웃들이 겪는 끔찍한 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도네시아만 해도 파푸아 같은 지역은 여전히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아체는 평화가 정착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조코 위도도 정부가 과거 아체에서 벌어진 중대한 인권침해를 인정했지만 중앙정부 차원의 진실 규명·사과·회복 조치는 아직 요원하다.

아체의 젊은 학자·교사·활동가들은 한국에 관심이 많다. K팝과 드라마의 영향도 크지만 그 밑바탕에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주의에 대한 관심과 존경이 있다. 한 인권 변호사는 “한국은 어떻게 그렇게 강력하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한국은 법치 수준이 높기에 가능하지만 자신들의 상황에서는 어렵다고도 했다.

나는 여기서 계속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국이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를 존중하는 나라가 된 것은 특별해서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왔기 때문이다. 불의와 억울함을 참지 않고 계속 싸웠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도 해냈으니, 당신들도 할 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공감을 얻고 한·일 외교 문제까지 되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싸움이 있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과거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성폭력 피해 고백은 개인과 가족의 수치로 여겨졌다. 이 아픔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피해자와 신뢰를 쌓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으며 그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귀 기울였다. 기록은 시민 연대로 이어졌고 하나의 움직임은 또 다른 운동으로 확산됐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민주주의는 전진하기도 후퇴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퇴보의 시기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 피해자 증언 채록, 민주시민교육, 1인 시위, 장기 농성 등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맞섰다. 고통의 목소리를 듣고 폭력을 기억했으며 사회는 연대했다. 그 힘이 모여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고 지켜내고 있으며 그 힘으로 망상적 쿠데타도 막아냈다.

지금 동남아시아 곳곳에서는 군사주의가 강화되며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현실에 젊은이들은 비관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사례를 보며 “우리도 할 수 있을까?”라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전쟁과 독재로 어려웠던 시절, 세계의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도왔다. 다시 바로 세운, 다시 만난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 인권·평화 중심의 공적개발원조(ODA), 평화 교육, 인권·평화 리더 양성과 연구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 작은 노력이 모여 우리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만들었듯이 흔들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 다른 미래를 만들 세계의 친구들을 계속 사귀며, 우리의 싸움과 경험을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지 머리를 쥐어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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