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는 꿈’기면증- 이창준 퍼스트 이비인후과 원장
2025년 06월 25일(수) 19:45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어요. 아무리 푹 자도 수업 중 눈이 저절로 감겼죠. 처음엔 단순한 피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험 볼 때도, 친구들이랑 웃다가도, 심지어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정신을 잃듯 잠이 들더라고요.”

올해 22세인 복무 중인 김 일병은 오랜 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졸음과 싸워왔다. 처음에는 게으르다는 오해를 받았고 우울증을 의심받기도 했다. 수많은 병원을 돌다 ‘기면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은 증상이 시작된 지 6년이 지난 후였다.

기면증(Narcolepsy)은 단순한 ‘잠 많음’이 아니다. 기면증은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 의식과 수면의 경계가 무너지는 신경계 질환이다.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주간과다졸림증. 낮 동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반복되고 깨어 있으려는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잠이 든다.

심한 경우에는 식사 도중, 대화 중, 운전 중에도 순간적으로 수면 상태에 빠진다. 이로 인해 직업, 학업, 대인 관계 등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또 다른 특징적인 증상으로는 탈력발작(cataplexy)이 있다. 강한 감정(웃음, 놀람, 분노)을 느낄 때 갑자기 무릎이 꺾이거나 턱이 빠지는 것처럼 근육의 힘이 순간적으로 풀리는 현상이다. 국내 기면증 환자 중 탈력발작을 경험하는 비율은 약 20~35%로 해외보다 낮은 편이다. 이로 인해 단순한 피로나 과로로 오인되기 쉬워 기면증 진단이 지연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기면증의 주요 원인으로는 뇌의 시상하부에서 분비되는 하이포크레틴(hypocretin, 또는 orexin)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결핍이 지목된다. 이 물질은 각성과 수면, 식욕을 포함한 생체 리듬을 조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자가면역 반응으로 이 신경세포가 파괴되면서 하이포크레틴이 거의 분비되지 않게 되면 뇌는 깨어 있어야 할 상황에서도 수면 상태로 전환되어 버린다.

해외에서는 뇌척수액을 통해 하이포크레틴 농도를 측정해 진단을 보조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검사가 상용화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 수면검사 결과에 의존해 진단이 이루어진다.

기면증은 다른 질환과 혼동되기 쉬워 진단이 평균 6~8년 이상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수면 부족이나 우울증, 불면증으로 오인되기 쉽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수면다원검사(PSG)와 다중수면잠복기검사(MSLT)라는 두 가지 전문 수면검사가 필요하다. 수면다원검사는 병원에서 하룻밤 동안 뇌파, 근전도, 호흡, 안구 움직임 등 수면의 질과 주기를 정밀 측정한다. 다중수면잠복기검사는 낮 시간대 졸음의 심각성을 평가하는 검사로, 다음 날 아침 두 시간 간격으로 4~5회에 걸쳐 낮잠을 유도하며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렘수면의 출현 여부를 확인한다. 기면증 환자는 낮에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렘수면에 진입하는 특징을 보인다.

기면증은 완치는 어렵지만 증상을 조절해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치료는 가능하다. 낮 동안의 졸음을 완화하기 위해 모다피닐(Modafinil) 같은 각성제 계열 약물이 사용되며 탈력발작이나 수면마비 증상이 동반된 경우에는 항우울제나 옥시베이트(Sodium Oxybate) 계열 약제가 효과를 보인다.

특히 기면증은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희귀난치질환(질병코드 G474)으로 정확한 진단 후 ‘산정특례’ 등록이 가능하다. 산정특례에 등록되면 진료비와 약제비의 본인 부담금이 10%로 경감되어 고가 치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 이 외에도 규칙적인 수면 습관, 계획된 짧은 낮잠, 수면 환경 개선 등의 생활 관리 전략이 병행되면 도움이 된다.

기면증은 잠들고 싶지 않아도 잠에 빠져버리는 병이다. 이 질환을 제대로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의료적 지원, 제도적 배려(예: 직장 내 유연 근무제, 학교에서의 시험 시간 조정)가 절실하다. 환자들이 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깨어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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