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꾼’ 영암 할머니들, 뮤지컬로 수다 배틀
전남문화재단, 브랜드 뮤지컬 ‘마실꾼들의 수다’ 기획 리딩 쇼케이스
조정 시인 ‘그라시재라’ 원작…남도 역사·사투리·K-pop 등 어우러져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총괄…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 연출 맡아
2025년 06월 17일(화) 20:05
무안 남도소리울림터에서 지난 16일 전남 브랜드 뮤지컬 ‘마실꾼들의 수다’ 리딩 쇼케이스가 펼쳐졌다. 쇼케이스의 한 장면. <전남문화재단 제공>
“오메오메 저 끝까지 꽃들이 한나 들어찼어라. 여간 이삐고 고마와요.”

무대 위로 남도 할머니들의 정겨운 사투리가 울려 퍼진다. 알록달록 몸빼를 차려입은 시골의 할머니들이 마을 한 켠 정자에 모여든다. 이미 수십여년을 함께 한 이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군사정권 등 질곡의 현대사를 함께 건너온 이들이다.

남도인의 고달팠던 삶, 피할 수 없었던 폭력과 맞닥뜨려 싸워야 했던 운명, 숱한 사랑과 이별의 사연이 꽉꽉 들어찬 이야기보따리가 흥겨운 음악과 함께 터져나온다.

전남문화재단(재단)이 전남 브랜드 뮤지컬로 기획한 작품 ‘마실꾼들의 수다’가 지난 17일 오후 무안 남도소리울림터에서 리딩 쇼케이스로 첫 선을 보였다. 리딩 쇼케이스는 정식 무대 전 대본과 음악 중심으로 구성된 시연 형태로, 본 공연의 가능성을 미리 가늠해보는 자리다.

작품은 조정 시인의 시집 ‘그라시재라’를 원작으로 한다. 1960년대 영암의 한 마을에 살던 여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들이 겪은 시대의 폭력과 개인의 상처를 씻김굿처럼 풀어낸다. 전쟁과 분단, 억압의 시대를 지나오며 가슴에 사연 하나쯤 품고 살아온 남도 여인들의 인생이 걸쭉한 사투리와 멜로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국내 1세대 뮤지컬 제작자로 꼽히는 해남 출신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가 총괄을 맡았고, ‘나는 광주에 없었다’ 등을 연출한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연출했다. ‘스웨그에이지: 외처, 조선’의 이정연 음악감독이 작곡과 편곡을 맡아 판소리, 트로트, EDM, 힙합 등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적 실험도 더했다.

제목의 ‘마실꾼’은 이웃집을 드나들며 동네 소식을 나누는 이들을 뜻한다. 시골 어르신들이 마을을 오가며 이웃집 대문을 슬쩍 들여다보고 “그 소식 들었어?” 하고 수다를 떠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에 맞게 작품은 ‘수다 배틀’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할머니들은 수다 속에 생의 한을 풀고, 때론 아이돌처럼 춤을 추며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되살린다. 구부정한 허리도 음악이 시작되면 쭉 펴진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다시 평범한 어미, 할머니로 돌아간다. 일상과 비일상이 오가는 경계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서사는 이색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작품은 한편으론 6·25 전쟁의 민간인 학살과 같은 남도의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죽은 딸 복자를 떠올리며 밥 한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제사 지내던 어머니의 “우리 복자 혼이 굽이굽이 저승길 돌아 어매라고 찾어와도 내가 낯들고 그 가스나를 못 봐라” 같은 대사는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동시에 무대에 등장한 복자의 영혼이 “괜찮아, 나는 씩씩하게 잘 갔어”라고 속삭일 땐, 위로의 정서가 극장을 감싼다.

공연은 이제 시작이다. 재단은 오는 2027년까지 이 작품을 브랜드 뮤지컬로 정식 제작해 전국 투어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이날 쇼케이스는 본 공연의 20~30% 수준으로, 아직은 미완의 형태다.

남도 사투리와 소리, 삶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점은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다만 수다 형식으로 전개되는 구성상 뚜렷한 스토리라인이 부족하고, 다수의 인물이 등장해 관객들이 서사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은 보완 과제로 지적된다.

김은영 전남문화재단 대표는 “완성도 높은 무대로 발전시켜 전국 관객들이 찾는 전남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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