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평가를 폐지하라 - 김진균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2025년 06월 17일(화) 00:00
대학에서는 지금의 한두 주 사이가 성적처리 기간이다.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기다리는 학생들만큼이나 교원들 대부분도 지금이 한 학기 중 마음이 가장 무거운 시기이다. 깊은 답안과 넓은 답안과 색다른 답안 모두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불성실한 답안과 무책임한 답안과 무기력한 답안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을 터인데, 상대평가 제도 아래에서는 1등부터 꼴등 사이의 순위에 가치와 사연을 담을 공간은 없다. 그만그만한 답안지들이 평점이 갈리는 지점에 걸려 있으면 출석부 사진을 여러 번 확인하면서 누구의 답안지에 더 높은 서열을 매길지 고민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성적 이의신청 기간에는 학교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머뭇거리게 된다. 어떤 하소연과 항의가 들어와 있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하소연과 항의를 납득으로 바꿔놓는 일에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과 감정이 소모되는데 이의신청을 하는 학생들은 해마다 늘고 있으니 가슴의 돌덩이가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이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그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채점 기준이 명확하여 성적이 예측 가능해질수록 이의신청은 적어진다. 그래서 비판력과 창의력을 묻는 논술형 문제는 도태되고 단편적 지식의 단답형 문제가 생존의 적자가 된다. 그리하여 대학 강의실에서 정답과 오답이 칼로 벤 듯 선명하게 나뉘는 문제만 찾다 보면 최첨단의 학문적 쟁점을 논하기는 어렵다. 구글 검색하면 나오는 수준의 사전적 지식만 주로 다룰 수밖에 없으니 교양시험 문제지와 공무원시험 문제지가 고래의 앞발과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상사기관(相似器官)의 관계가 되어버린다. 다음 단계는 취업학원이 대학을 압도하여 우세종이 되는 일이 아닐까.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역할까지 망가뜨리는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망가진 노동환경이다. 사실 성적 이의신청에 몰리는 학생들은 졸업 이후에 만나게 될 노동환경이라는 선택압력에 의해 그렇게 적응해 온 것일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절망적 낙차,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간격을 학생들은 이미 감지하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도 부모 세대만큼의 경제적 재생산이 어렵고 가정을 꾸리는 것조차 불확실한데 하물며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이하의 길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빵이나 전기를 만든다며 노동자를 죽인 기업이 또 노동자를 죽이고 있는데 할 수 없이 그 회사라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누군들 피하고 싶지 않겠는가.

성적순으로 나눠주는 대기업 입사 추천서라도 받아보고 거기 지원해서 붙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학생은 악착같은 학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성적이 A+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채점 기준을 법무적 쟁점으로 따져보거나 갑자기 조부님이 입원하시고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성적우수장학금을 꼭 타야 하는 사연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이런 학생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교원도 있지만 대개 그들 자신도 계량화된 논문 편수라는 명확하고도 반학문적인 기준으로 평가받는 일에 적응하여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역할을 회복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진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동환경의 개선이다. 대학 내 노동환경부터 개선하고 학문적 다양성을 확보하여, 노동의 존엄을 이해하는 학생들을 배출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인해 노동의 의미 자체가 변할 것이라는 예언도 있지만 노동자를 사람으로도 생명으로도 대접하지 않는 19세기적 수렁에서 여전히 질척거리고 있는 한국의 노동시장에서는 21세기적 걱정에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교육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그 성과가 고등교육의 영역으로 되돌아오고 다시 강의실에서 최첨단의 학문적 쟁점을 논할 수 있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을 앞당길 방법이 하나 있다. 지금 당장 상대평가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서열 강박에서 풀려나면 교원은 마침내 비판력과 창의력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단답형의 단편적 지식으로 파악하던 학문을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학생들은 모든 학문이 인간다움을 위한 문명적 노력이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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