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덕한 산세·의기와 정신 광주 문학의 보고 ‘무등산’
[(8) 무등산과 문학]
수려한 경관, 청아한 물소리·새소리
‘광주의 어머니’로 무한한 영감의 원천
문학 작품·그림·노래 소재로 사랑 받아
고려 시인 김극기, 규봉암 배경 첫 시문
의병장 고경명 ‘유서석록’ 문학 가치 높아
정철·임억령·김성원 등 시가 문학 꽃피워
2025년 06월 16일(월) 08:00
임채욱 작 ‘무등산 2572’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은 생명이다. 무한한 영감의 저수지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작품의 모티브로, 그림의 소재로, 노래의 배경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드러내놓고 위용을 자랑하지 않는 무등산. 덕자형의 후덕한 산세와 내부의 오묘한 절경이 이룬 조화는 여느 산과 비교할 수 없다. 수려한 경관 이면에는 남도인 특유의 의기와 정신도 드리워져 있다. 무등산은 곧잘 온후한 성정에 대쪽의 결기를 지닌 외유내강의 선비에 비견된다.

무등산에 오르면 문인이 아니어도 절로 시문이 나온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 바람소리, 아름다운 외경은 시심을 돋운다. 무등산은 광주 문학을 품은 푸르른 문림(文林)이라 할 수 있다.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하기 어렵구나/ 올아 앉아 보니 만상(萬像)이 고르며/ 돌모양은 비단으로 말아낸 듯/ 봉우리는 옥을 다음은 듯/ 명승을 밟으니 속세의 자취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네/ 속세 인연 어떻게 끊으리/ 가부좌를 틀고 무생(無生)을 배우리”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가 규봉암에 올라 지은 작품이다. 관직을 떠나 초야에 묻혀 지내는 심회가 담담하게 기술돼 있다. 속세의 연을 끊고 초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전해온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무등산 시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다양한 창작의 소재였다. 철쭉이 만개한 무등산 입석대.






‘무등산가’는 김극기의 시보다는 앞선 작품이지만 제목과 배경 설화만 전해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무등산가’는 무등산에 쌓은 성으로 백성이 태평안락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백제 정신을 노래한 저항가로 보기도 한다. 백제가 멸망한 후 유민들이 신라에 투항하지 않고 깊은 계곡에 남아 재건을 도모했다는 설도 있다.

‘유서석록’은 임란 때 의병대장 고경명이 41세 되던 해(선조 7년·1574) 음력 4월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무등산에 올라 느낀 감회를 기술한 기행문이다. 16세기 불교문화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자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무등산은 우리 빛고을의 진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무등산에 올랐다.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엔 여전히 내 발자취가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늘 못내 아쉬웠다. 지금까지 풍경만을 대강 훑어보았던 터라 단 한번도 내밀한 속살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온전히 산의 맛을 알기에 나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중략) 얼마쯤 잤을까. 단잠에서 깨어보니 저녁놀은 서산에 비끼고 안개가 자욱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놀란 사슴이 대밭에 숨어들고 새떼들은 숲속으로 날아든다. 마음이 추연해진다.”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제봉 고경명이 무등산을 오르며 느낀 단상과 소회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하다. 시간이 흘러도 무등산이 주는 감성과 서정, 서경의 느낌은 여일하다. 4박 5일 답사기에서 고경명은 ‘괴석은 비단을 오려내 장식했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었네’라고 무등산을 예찬했다.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서 태어난 김덕령도 무등산을 모티브로 시를 지었다. 의병을 규합해 왜군을 물리쳤지만 안타깝게도 모함이라는 덫에 걸려 29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끝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없는 불 일어나니 끝 물 없어 하노라” 죽음을 예감하고 쓴 김덕령의 충심과 단심, 올곧음이 투영된 시다.

김덕령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취가정’.
북구 충효동 환벽리에는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취하여 노래하는 정자’라는 뜻의 취가정에는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는 ‘취시가’(醉詩歌)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김덕령이 선조 때의 문인 석주(石州) 권필(1569~1612)의 꿈에 나타나 맺힌 한을 풀어낸 것이다. 얼마나 원한이 서렸으면 다른 이의 꿈에 나타났을까. 그것도 술에 취해 취시가(醉詩歌)를 읊었을까 싶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나는 화월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나는 공훈을 세움도 바라지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 구름이요/ 화월에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사람 없네/ 내 마음은 장검으로 명군께 보답만 하고지고”



조선 중기 이후 무등산 일대에서는 시가 문학인 성산가단이 태동한다. 식영정·송강정·취가정·환벽당·소쇄원은 가사문학의 산실로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은 가사를 수준 높은 우리 문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오늘날 광주의 문학이 무등산을 토대로 의미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역사적인 내력과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근대 이후 무등산을 노래한 대표 문인은 육당 최남선을 꼽을 수 있다. 개화기 대표적 시조시인인 그는 1925년 국토예찬의 기행문 ‘심춘순례’에서 무등산의 풍광을 찬미한다. 무등산 3대 석경(石景)의 하나인 입석대를 노래한 시조는 그 뜻이 깊다.

“어느제 지으셨다/ 어이 다시 뜯으신고/ 거룩한 기둥받침/ 새것처럼 남앗세라/ 터마저 하느님 나라/ 고개 절로 숙어라”

무등산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며 광주와 남도를 수호하는 정신적 지주로 표상된다. 고난으로 점철된 남도의 한과 아픔을 말없이 위무해주었던 것이다. 미당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는 어머니의 어깨로 표현되는 모산(母山)의 이미지가 읽힌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어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 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이 시는 무등산을 노래한 시 가운데 절창으로 꼽히는 수작이다. 6·25 이후 서정주가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쓴 시로, 당시의 곤고한 삶과 무등의 의연함이 서정적으로 묘사돼 있다. 무등을 보며 삶의 남루함을 이겨내자는 의지는 오늘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환기한다.

노산 이은상의 무등산에 대한 표현도 있다. 노산은 “해금강은 바다의 서석산이고 서석산은 육지의 해금강”이라며 “이런 명산을 가까이 두고 있는 광주시민들은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해, 무등산(서석산)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취시가비’
고독의 시인 다형 김현승도 무등산을 노래했다. 다형이 추구했던 절대고독의 이미지는 무등산의 쓸쓸한 모습과 겹쳐진다. ‘산줄기에 올라-K도시에 바치는 노래’는 그런 내용을 아우른다.

“산줄기에 올라 바라보면/ 언제나 꽃처럼 피어 있는 나의 도시/ 지난 날 자유를 치하여/ 공중에 꽂힌 칼날처럼 강하게 싸우던/ 그곳에선 무덤들의 푸른 잔디도/ 형제의 이름으로 다스웠던…”

60년대 이후에는 무등산을 노래한 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무등산을 모성으로 상징화하거나 이미지화한 시들이 대부분이다. 수사와 기교 또한 후덕하고 평등한 기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80년대가 들어서면서 무등산의 이미지는 기존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자애하고 평등하며 정적인 대상이었던 무등산은 불의의 역사를 부릅뜨고 지켜보는 증언자로 바뀐다.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정의와 의기의 이미지가 투영된다. 문병란의 연작시 ‘무등산의 말’, 김준태의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송수권의 ‘무등이여 무등이여’, 나해철의 ‘무등에 올라’ 등은 무등산을 묘사한 당대의 수작들이다.

그 가운데 김준태의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80년 5월 광주를 대표하는 영원한 광주의 시로 불린다.

그렇게 오랜 세월 무등산은 많은 문인들에게 시적인 영감을 주었다. 시대는 무등산을 부르고 무등산은 다시 그 시대를 불러, 역사를 증거하고 남도인들을 위무했던 것이다. 무등산은 영원한 창작의 원천이자 내일을 바라보게 하는 우리들의 가슴 뜨거운 사랑이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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