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팬데믹’ 당뇨병- 양태영 태영21내과 원장
2025년 04월 24일(목) 00:00
“의사 선생님, 저는 정말 아무 증상도 없었어요. 그냥 피곤해서 건강검진을 받았을 뿐인데요…”

얼마 전 외래에서 만난 52세 남성 환자 A씨의 말이다. 그는 공기업에 재직 중으로 업무 스트레스를 안고 살지만 특별한 병력도 없었고 평소 식사나 체중에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당화혈색소(HbA1c)는 8.3%, 공복 혈당은 165mg/dL으로 이미 당뇨병 진단 기준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놀란 그는 “그럼 저는 당뇨병인가요?”라고 되물었다. 그렇다. A씨는 ‘자신도 모르게’ 당뇨병이 진행되어 있던 전형적인 경우다. 이처럼 당뇨병은 대개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우리 몸을 잠식한다. 증상이 거의 없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혈관과 신경, 장기를 조금씩 망가뜨린다.

수치상으로는 전 세계 9명 중 1명이 당뇨병 환자이며 10명 중 4명은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몰라 진단조차 못 받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2025년 4월 7일~10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 당뇨병 총회’에서 국제당뇨병연맹(IDF)은 충격적인 수치를 발표했다. 전 세계 성인 당뇨병 환자 수가 5억 8900만명에 달하며 그중 2억 5200만명은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인 9명 중 1명 꼴이며 미국·캐나다·멕시코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치다. 게다가 당뇨병 환자 수는 2050년까지 8억 53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매년 340만명 이상이 당뇨병 관련 질환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특히 당뇨병으로 인한 의료비 지출은 2024년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됐다. 개인 건강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부담을 초래하는 글로벌 보건 위기인 셈이다.

당뇨병의 무서움은 그 자체보다도 ‘무증상으로 오래 방치된다’는 점에 있다. 2형 당뇨병은 비만, 운동 부족, 잘못된 식습관, 스트레스 등 생활습관 요인에 의해 서서히 진행된다. 전문가들은 성인 8명 중 1명이 ‘당뇨병 전단계(공복혈당장애, 내당능장애)’에 있으며 이들이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상당수가 수년 내 당뇨병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한당뇨병학회의 ‘2024 팩트시트’에 따르면 2022년 기준 30세 이상 성인 중 533만명이 당뇨병을 앓고 있으며 이는 7명 중 1명 꼴이다. 하지만 진단율은 70%에 머물고 있어 여전히 약 150만명 이상이 진단되지 않은 상태로 추정된다.

앞서 소개한 A씨의 사례처럼 많은 환자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 신호를 놓친다. 이유 없이 피곤하거나 체중이 급격히 줄었다. 물을 자주 마시고, 소변도 잦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경우가 많다. 작은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등이다.

이러한 증상들이 있을 경우 반드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당뇨병은 조기에 발견해 관리하면 심각한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진단이 늦어지면 심근경색, 뇌졸중, 실명, 투석, 하지절단 등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당뇨병연맹(IDF) 회장 페터 슈바르츠 교수는 “당뇨병은 더 이상 한 국가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차원의 과감한 조치가 필요한 팬데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진단받지 못한 환자 수가 전체의 40%에 달하는 만큼 국가 차원의 선제적 검진체계와 의료계의 적극적인 개입, 국민 인식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우리는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질병이 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조용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는 당뇨병에 대해 지금 우리가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면 미래의 보건 재앙은 현재보다 더 클 수 있다.

앞으로의 당뇨병 예방 전략은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정확히 진단하고 예방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활습관 개선, 정기 검진, 예방 교육은 작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다. 당신의 피곤함, 갈증, 불면이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당뇨병의 시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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