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품속에서 살자- 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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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있는 사람은 사람이 주는 상벌보다 진리가 주는 상벌을 더 크고 중하게 여기나니라.”
이 말씀은 원불교 교전 대종경에 있는 말씀이다. 모든 물고기는 물속에서 산다. 물이 없어지면 물고기는 살 수 없다. 모든 생물은 공기 속에서 산다. 공기가 없어지면 모든 생물은 살 수 없다. 우리 사람은 진리 속에서 산다. 진리를 어기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는 물을 잊기 쉽다. 공기 속에서 사는 모든 생물도 공기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산다.
사람은 진리 속에서 살면서 진리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이따금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가 물 밖에 있다 할지라도 물고기는 물을 외면하고 살 수 없다.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다. 우리 사람은 어떠한 황홀한 세계를 동경하다가 진리세계를 이탈해 보려는 모험을 가끔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만다. 오히려 많은 고통의 선물을 받게 된다. 진리를 인식하면서 진리적 표준으로 살기를 원한다.
진리란 형상도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크고 작음도 없다. 선도 악도 없고, 죽고 낳지도 않으며 영생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안아 주시는 품이 있다. 또는 진리는 없는 듯 우리 주위에 항상 계시면서 슬기로운 빛을 온 누리 구석구석에 비추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이토록 영명하신 진리를 속여 보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이따금 있다.
그러나 주위에는 많은 눈이 있다. 옛 말씀에 암실에서 혼자 간직한 마음도 진리는 번개처럼 빠르게 통하여 알고 있다 했다. 그러기에 열 눈으로 보고 있으며 열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있으니 이 무섭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므로 원불교 교전 일원상 진리편에서는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난다고 했다. 전체 우주도 손바닥 구슬 굴리듯 하시는 이 진리를 속여 보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다시없어야 하겠다. 진리는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고 듣고 알고 계시면서 그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시며 모든 것을 만들고 바꾸고 있게도 없게도 하면서 영생한다.
이러한 진리를 원불교 교전 일원상 진리편에서는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해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한다고 했다. 이 모든 말씀은 진리는 반드시 응답이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이 무궁하시다는 말이다. 진리를 모르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이웃과 세상이 몰라 줄까 봐 안달이다. 윗사람이 몰라주나 좌우에서 몰라주나 밑에서 몰라주나 초조해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은그렇지 않다. 오직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여 갈 뿐이다. 이것은 진리께서 우리의 하나하나를 다 보아 알고 계시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덕에 따라서 우리의 죄를 덜어 주는 상을 베풀기도 하고 복된 상을 틀림없이 주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람이 잘 잘못간에 한 모든 행동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안다면 이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배우가 연출한 모든 연기는 그대로 필름과 테이프에 담겨진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대로 재생시켜 준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한 모든 행동은 수 천 수 만리의 안방구석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허공법계에 그대로 새겨지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사실로 증명해 준 큰 가르침이다. 그러한 진리가 없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은 잠꼬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진리의 조화와 작용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한때도 멈춤이 없는 거룩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서 이 엄연한 진리의 존재를 솔직히 인정하고 믿어서 진리의 뜻으로 살아가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원불교 교전 대종경에 있는 말씀이다. 모든 물고기는 물속에서 산다. 물이 없어지면 물고기는 살 수 없다. 모든 생물은 공기 속에서 산다. 공기가 없어지면 모든 생물은 살 수 없다. 우리 사람은 진리 속에서 산다. 진리를 어기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는 물을 잊기 쉽다. 공기 속에서 사는 모든 생물도 공기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산다.
그러나 주위에는 많은 눈이 있다. 옛 말씀에 암실에서 혼자 간직한 마음도 진리는 번개처럼 빠르게 통하여 알고 있다 했다. 그러기에 열 눈으로 보고 있으며 열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있으니 이 무섭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므로 원불교 교전 일원상 진리편에서는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난다고 했다. 전체 우주도 손바닥 구슬 굴리듯 하시는 이 진리를 속여 보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다시없어야 하겠다. 진리는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고 듣고 알고 계시면서 그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시며 모든 것을 만들고 바꾸고 있게도 없게도 하면서 영생한다.
이러한 진리를 원불교 교전 일원상 진리편에서는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해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한다고 했다. 이 모든 말씀은 진리는 반드시 응답이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이 무궁하시다는 말이다. 진리를 모르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이웃과 세상이 몰라 줄까 봐 안달이다. 윗사람이 몰라주나 좌우에서 몰라주나 밑에서 몰라주나 초조해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은그렇지 않다. 오직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여 갈 뿐이다. 이것은 진리께서 우리의 하나하나를 다 보아 알고 계시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덕에 따라서 우리의 죄를 덜어 주는 상을 베풀기도 하고 복된 상을 틀림없이 주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람이 잘 잘못간에 한 모든 행동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안다면 이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배우가 연출한 모든 연기는 그대로 필름과 테이프에 담겨진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대로 재생시켜 준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한 모든 행동은 수 천 수 만리의 안방구석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허공법계에 그대로 새겨지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사실로 증명해 준 큰 가르침이다. 그러한 진리가 없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은 잠꼬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진리의 조화와 작용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한때도 멈춤이 없는 거룩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서 이 엄연한 진리의 존재를 솔직히 인정하고 믿어서 진리의 뜻으로 살아가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