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기행] 빈민가에 핀 순백의 미술관…사람과 예술 잇는 공간 혁명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슬럼가였던 라발지구, 1985년 도시재생
아티스트-민간 협업 건물 외벽 등 벽화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 설계
복합 미술관 건축 스페인 현대미술 전시
미술관 앞 열린 광장 청년들 ‘핫플’로
20세기 이후 현대미술 6000여점 소장
슬럼가였던 라발지구, 1985년 도시재생
아티스트-민간 협업 건물 외벽 등 벽화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 설계
복합 미술관 건축 스페인 현대미술 전시
미술관 앞 열린 광장 청년들 ‘핫플’로
20세기 이후 현대미술 6000여점 소장
![]() ‘백색건축의 거장’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의 전경. |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 가운데 하나는 바로 람블라스거리(Ramblas Street)다. 카탈류냐 광장에서 콜럼버스 기념탑까지 이어지는 1.3km의 전용도로에는 개성 넘치는 벤치와 예술가들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명칭은 거리이지만 교통 요지이자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 같은 곳으로 바르셀로나 여행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람블라스 거리에서 조금 더 구시가지쪽으로 들어가면 독특한 분위기의 라발(Raval)지역이 나온다. 바르셀로나의 핫플레이스로 불리는 이 곳은 소문 대로 화려한 색감과 역동적인 형상이 인상적인 그래피티(건물 벽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가 여기 저기 눈에 띈다. 젊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벽화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범상치 않은 흰색 건물이 눈앞에 등장한다. 라발지구의 아이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Museu d’Art Contemporani de Barcelona, MACBA)다. 한때 빈민가의 우범지역라는 불명예를 안았던 라발을 문화적 도시재생을 통해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신시킨 진원지이다.
순백의 모던한 디자인에 이끌려 미술관으로 향하면 또 한번 이색적인 풍경에 놀라게 된다. 미술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스케이트보더들의 열기 때문이다. 10대후반이나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광장을 무대로 보드를 즐기고, 이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유튜버와 이들을 배경으로 패션화보를 찍는 작가들까지 활기가 넘친다. 불과 40여 년전 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구 5만 여명이 거주하는 라발은 이주민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슬럼가로 변했다. 1870~1940년대 산업혁명으로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이주민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 범죄, 마약, 전염병 등 예기치 못한 사회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거주 인구의 절반이 비유럽국가에서 온 이주자들로 바르셀로나 신시가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페인 카탈류냐 지방정부와 바르셀로나시 자치위원회는 1985년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낡고 노후한 건물로 인해 칙칙한 라발지구를 예술가들의 손에 맡겼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지역의 민간단체들과 협업해 오래된 건물 외벽에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을 그려 넣었고, 주말 마다 크고 작은 이벤트를 꾸려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라발 지구의 도시재생에 꽃을 피운 건 1995년 문을 연 MACBA다. 인근 고딕지구의 피카소 미술관이나 도시 외곽의 후안미로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과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20세기 이후 스페인 작가들의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바르셀로나시의 장밋빛 비전에 날개를 단 건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설계였다. 세계 곳곳에 시그니처인 순백의 건축물을 건립한 마이어는 스페인의 러브콜을 받고 전시, 공연, 세미나 등을 위한 복합미술관을 짓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고풍스런 건물과 어두운 분위기가 공존하는 고딕지구라는 장소성이었다. 수백년 전의 건축물과 현대적 미술관의 앙상블을 실현하고 싶은 건축가로서의 욕망이 컸던 것이다.
지난 1990년 거장 마이어는 MACBA의 예술작품을 통해 시민적 담론을 창출하는 공공의 장을 구현하기 위해 미술관 앞을 열린 광장으로 디자인했다. 그래서 미술관 앞에 서면 화이트 톤의 거대한 건물을 배경으로 텅 빈 마당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을 보는듯 하다.
광장을 지나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말 그대로 ‘백색 세상’이 펼쳐진다. 마이어가 1년간 공을 들여 설계한 미술관은 크게 3개의 건물로 이어진 독특한 집합체이다. 연 면적 1만4000㎡에 120 x 35m의 기둥과 23m 높이의 각기둥들로 지어진 지상 7층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자리한 원통형의 건물은 메인 전시장으로 1층부터 7층 천장까지 아우르는 미술관의 얼굴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빛과 백색, 벽의 볼륨감을 이용해 자연채광을 끌어 들이는 콘셉트를 도입했다. 미술관 로비에 서면 햇빛의 세기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원통형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빛이 쏟아지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원통형 유리로 마감된 로비를 지나면 3개 층이 오픈된 대형 전시장이 펼쳐진다. 이 공간에 설치된 유리 커튼월은 미술관 앞 광장을 바라보고 있어 내부에서 보면 광장과 미술관 전시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한 착각이 든다. 관람객들은 커튼월을 끼고 1층에서 고층으로 실내 경사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밖의 풍경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미술관과 광장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은 다른 미술관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색다른 즐거움이다.
건축미 못지 않게 MACBA의 품격을 높여주는 건 방대한 스펙트럼의 컬렉션이다. 대부분 20세기 이후의 스페인 작가와 외국 작가들의 현대미술작품 6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1968년 전후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소장품 가운데 예술가들의 드로잉, 편지, 스케치 등 아카이브는 다른 미술관에서 보기 힘들 만큼 독보적이다. 미술관은 아카이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속시설인 도서관에 상설 전시해 보다 많은 이들이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을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MACBA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미술관 등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스페인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주제별로 집중 수집해 차별성을 인정받고 있다. 시인이자 미술가인 마르셀 브루타에스의 16㎜ 고전 필름, 상징기호와 오브제를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하는 스페인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 스페인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호안 라바스칼, 프란세스크 토레스, 레이문도 파티뇨 등이 대표작이다.
전시는 크게 소장품을 중심으로 기획하는 상설전과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하는 특별전, 아카이브전으로 꾸며진다. MCABA의 컬렉션은 스페인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자국민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 알리는 쇼케이스장이기도 하다. 한해 전 세계에서 1억 명이 가까운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대국 답게 연중 7~8개의 기획전을 통해 스페인 작가들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와함께 라발지역의 재생 일환으로 건립된 미술관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피카소 미술관, 후안 미로 미술관에 뒤지지 않는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초·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교실에서부터 바르셀로나 시내 소재한 학교들을 순회하는 ‘학교 탐방’, 예술작품을 통해 상상력을 키워주는 ‘예술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육수업’ 등 다양하다.
/바르셀로나=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그도 그럴것이 인구 5만 여명이 거주하는 라발은 이주민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슬럼가로 변했다. 1870~1940년대 산업혁명으로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이주민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 범죄, 마약, 전염병 등 예기치 못한 사회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거주 인구의 절반이 비유럽국가에서 온 이주자들로 바르셀로나 신시가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페인 카탈류냐 지방정부와 바르셀로나시 자치위원회는 1985년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낡고 노후한 건물로 인해 칙칙한 라발지구를 예술가들의 손에 맡겼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지역의 민간단체들과 협업해 오래된 건물 외벽에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을 그려 넣었고, 주말 마다 크고 작은 이벤트를 꾸려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라발 지구의 도시재생에 꽃을 피운 건 1995년 문을 연 MACBA다. 인근 고딕지구의 피카소 미술관이나 도시 외곽의 후안미로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과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20세기 이후 스페인 작가들의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바르셀로나시의 장밋빛 비전에 날개를 단 건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설계였다. 세계 곳곳에 시그니처인 순백의 건축물을 건립한 마이어는 스페인의 러브콜을 받고 전시, 공연, 세미나 등을 위한 복합미술관을 짓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고풍스런 건물과 어두운 분위기가 공존하는 고딕지구라는 장소성이었다. 수백년 전의 건축물과 현대적 미술관의 앙상블을 실현하고 싶은 건축가로서의 욕망이 컸던 것이다.
![]()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은 지역의 초·중등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광장을 지나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말 그대로 ‘백색 세상’이 펼쳐진다. 마이어가 1년간 공을 들여 설계한 미술관은 크게 3개의 건물로 이어진 독특한 집합체이다. 연 면적 1만4000㎡에 120 x 35m의 기둥과 23m 높이의 각기둥들로 지어진 지상 7층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자리한 원통형의 건물은 메인 전시장으로 1층부터 7층 천장까지 아우르는 미술관의 얼굴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빛과 백색, 벽의 볼륨감을 이용해 자연채광을 끌어 들이는 콘셉트를 도입했다. 미술관 로비에 서면 햇빛의 세기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원통형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빛이 쏟아지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원통형 유리로 마감된 로비를 지나면 3개 층이 오픈된 대형 전시장이 펼쳐진다. 이 공간에 설치된 유리 커튼월은 미술관 앞 광장을 바라보고 있어 내부에서 보면 광장과 미술관 전시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한 착각이 든다. 관람객들은 커튼월을 끼고 1층에서 고층으로 실내 경사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밖의 풍경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미술관과 광장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은 다른 미술관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색다른 즐거움이다.
건축미 못지 않게 MACBA의 품격을 높여주는 건 방대한 스펙트럼의 컬렉션이다. 대부분 20세기 이후의 스페인 작가와 외국 작가들의 현대미술작품 6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1968년 전후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소장품 가운데 예술가들의 드로잉, 편지, 스케치 등 아카이브는 다른 미술관에서 보기 힘들 만큼 독보적이다. 미술관은 아카이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속시설인 도서관에 상설 전시해 보다 많은 이들이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을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 미술관 앞 광장은 보드를 즐기는 젊은이들과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청년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
전시는 크게 소장품을 중심으로 기획하는 상설전과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하는 특별전, 아카이브전으로 꾸며진다. MCABA의 컬렉션은 스페인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자국민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 알리는 쇼케이스장이기도 하다. 한해 전 세계에서 1억 명이 가까운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대국 답게 연중 7~8개의 기획전을 통해 스페인 작가들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와함께 라발지역의 재생 일환으로 건립된 미술관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피카소 미술관, 후안 미로 미술관에 뒤지지 않는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초·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교실에서부터 바르셀로나 시내 소재한 학교들을 순회하는 ‘학교 탐방’, 예술작품을 통해 상상력을 키워주는 ‘예술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육수업’ 등 다양하다.
/바르셀로나=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