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 김향남 수필가
2025년 03월 10일(월) 00:00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 켈리 라이카트 감독, 2019)’는 묻힌 이야기를 꺼내어 다시 보여주는 영화다. 천천히 보게 되면 우리가 놓친 게 무엇인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주는 영화다.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면 스치고 간 것들을 더 깊게 보게 되고, 놓치고 온 것들을 더 애틋하게 되살릴 수 있다고도 말해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강과 대지와 하늘이 수평으로 펼쳐진다. 강은 잔잔하고 대지와 하늘빛은 수수해 보인다. 화면 왼쪽에서 서서히,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배 한 척이 등장한다. 무엇을 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는 강과 대지와 하늘 가운데로 육중하게 밀고 들어온다. 배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카메라는 미동도 없이 그 배의 느린 움직임을 포착한다. 관객은 다만 숨죽이며 지켜보아야 한다. 이렇게나 오래 보여주는 데는 다 뜻이 있을 테니까. 더 몰입도를 높이려는 순간 장면은 휙 다른 곳으로 넘어가 있다.

영화 어디에도 도입부의 그 장면과 직접적인 연결점은 없는 듯하다. 있다면 시간의 차이 정도? 왜냐면 그 거대하고 육중한 배는 현대문명 혹은 거대자본의 표상이라 할 만한데, 영화의 시공간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개와 산책 중이던 한 여성에 의해 두 구의 백골 시신이 발견되고 영화는 그 죽음의 경위를 좇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서부 개척시대, 중국계 이민자 ‘킹루’와 유대인 출신 ‘쿠키’의 위태로운 사업과 그들의 우정이 서사의 주된 맥락이다. 두 사람은 오리건 주에 도착한 최초의 암소 젖을 몰래 짜서 쿠키를 만들어 팔지만, 그들의 작은 성공은 암소의 소유자인 ‘팩터’ 대장의 추격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영화가 끝나고서야 도입부의 화면이 비로소 이해된다. 마지막 자막에 “피터 허턴 감독님께 바침”이라는 헌사가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정지화면처럼 느릿느릿 천천히 다가오던 그 화면은 감독의 주문이자 요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피터 허턴’은 이른바 ‘느린 영화’에 천착해온 실험영화 감독으로, 그에게 영화란 거창한 관념의 일이라기보다 구체적인 일상의 풍경을 아주 천천히 묵상하듯 마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퍼스트 카우’는 그에게 헌정하는 것이니 도입부의 화면은 강물 위로 천천히 배가 밀려오듯이, 저게 무얼까 곰곰이 눈여겨보라는 주문일 것이다.

영화를 되새겨보다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다녀와야 하는 곳이었다. 산사에 이르기까지의 짧지 않은 거리가 마치 수행자의 길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목적지로 오르는 길, 좁다란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길이 뚝 끊겨 계곡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막혔다 싶으면 외나무다리가 길을 다시 이어주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벼랑이 또 앞을 막아섰다. 그 벼랑에 세운 철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층층이 놓인 돌계단 너머로 오래된 절 하나가 우뚝 눈앞에 다가왔다.

그곳에 목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바람에 마르고 햇살에 마르고 세월에 마르고, 두 눈 부릅뜬 채 밤낮으로 잘 마른 목어였다. 별다른 장식이나 채색 없이 순백한 나뭇결 그대로 ‘천, 천, 히’ 잘 마른 목어 한 마리가 꽃비 내리는 창 앞을 지키고 있었다. 속 비워 정갈한 몸매는 날아오를 것처럼 가뿐해 보였다. 그러나 켜켜이 내려앉은 고요를 두고 차마 떠나지는 못한 듯했다.

‘적묵당’ 마루에는 시간도 빛도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햇살은 유난히 그윽하고 따스했다. 시간은 흐르기를 잊은 채 멈추어 있었다. 그곳에 앉아 건너편의 목어를 바라보고 있는데, 조그만 바라지창으로 꽃나무가 아른거렸다. 살랑살랑 제 몸을 흔들어 바람과 햇살과 더불어 소풍을 즐기는 걸까. 새들은 점점 소리 높여 노래했다. 그곳에 나는 없고, 바람과 햇살과 목어와 새만 있는 듯 하염없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일어서려는데, 그 절의 보살님, 기꺼이 한 말씀을 거드셨다.

“내려갈 때는 이 길로 사부작사부작 걸어가 보셔유.”

그 소리가 어찌나 곰살스러운지, 졸고 있는 삽살개조차 더 몸을 수그렸다.

첩첩한 골짜기, 구불구불 닦아놓은 임도를 따라 ‘사부작사부작’ 내려오는 길, 길은 길대로 나는 나대로 어쩐지 더욱 상그러웠다. 실바람처럼 봄이 오고 있었다.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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