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세계문학중심도시로] 김태오, 양파정서 ‘소년·동요’운동으로 민족문학 깃발 올리다
[(2) 근대 광주 민족문학]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상실 위기감
호남 지식인들, 학회 세워 애국계몽운동
근대 광주문학, 사직공원 일대에서 시작
양파정, 문인들 교유하며 시단 형성
김태오 ‘강아지’·‘봄맞이 가자’ 등 지어
문학·동요 매개로 항일 민족운동 전개
2025년 03월 09일(일) 20:05
사직공원에 있는 양파정은 일제강점기 정낙교가 지은 누정이다. 김태오 동요작가는 이곳에서 소년운동과 동요운동을 매개로 민족문학을 전개했다.
광주 문학의 근간은 의로움으로 대변되는 저항정신이다. 광주 사람들은 역사적 난국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5·18 당시 광주와 남도인들은 결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위해,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총칼에 맞서 대항했다.

이 같은 정신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광주’(光州)의 정체성은 지명이 내재하는 의미에서 일말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빛의 고을’이라는 뜻에서 보듯, 광주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빛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다.

빛의 반대는 어둠이다. 어둠이 몰려올 때, 어둠의 세력이 발호할 때 광주는, 광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감지했다. 그리고 어둠의 세력에 결코 함몰되거나 굴복하지 않고 단호하게 일어섰다. 어떤 시련과 역경, 회유와 겁박도 ‘빛의 정신’을 굴절시킬 수 없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태생적으로 빛은 밝음과 의를 지향한다. 광주 문학에 드리워진 정신 또한 그러한 것은 자명하다.

광주문학은 1920년대까지 일제에 맞선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증폭되자 호남 지식인들은 1907년 호남학회를 창립했다. 이어 1908년 서울에서 기관지 ‘호남학보’를 창간해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호남지역 정신과 정체성을 북돋우기 위해 매진했다. 비록 안타깝게 이듬해 9호를 발간하고 폐간되었지만 광주 나아가 호남 정신의 의기를 보여준 사례였다.

김태오 동요작가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洵·1891~1936)은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광주 정신을 견지하고 설파했던 언론인이자 문학인이었다. 그는 부인 현덕신과 함께 광주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2·8독립선언의 주역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대리를 역임하면서 최초 언론인 조직인 무명회와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전 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주도했다. 또한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광주 사람의 기개와 정체성을 추구하고 지향했다.

또한 근대 광주문학은 사직공원 일대에서 전개됐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지정된 광주 제2호 공원인 사직공원은 아날로그 감성이 녹아 있는 곳이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옛 정서와 문향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사직공원에는 양파정(楊波亭)이라는 누정이 있다. 언제 찾아도 팔작지붕이 발하는 누정의 기운은 삽상하면서도 뭉근하다. 날씨가 다소 흐려 햇볕이 투명하지는 않은데 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미세먼지 탓이다.

이곳을 찾을 때면 늘 두 인물을 생각하게 된다. 정낙교(鄭洛敎·1863~1938)와 김태오(金泰午·1903~1976)가 그들이다.

알려진 대로 양파정은 정낙교가 지었다. 그는 현준호, 최명구와 함께 광주의 이름난 부자였는데 그에게는 ‘광주전남의 부호’, ‘광주의 복인(福人)’ 수사가 따랐다.

사직공원 내 자리한 사직단.
정낙교가 정자를 이곳 양림산 언덕에 세운 것은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본디 이곳은 석서정(石犀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석서정기’에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빛의 고을은 지세가 다 큰 산인데 북쪽만 평탄하다’는 내용이 글머리에 기술돼 있다.

예전의 광주천, 오늘날과 같은 직강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폭이 일정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양파정 아래 인근은 폭이 좁아 물난리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강폭이 장구의 허리처럼 가늘어지는 구간이었다. 1380년대쯤 광주목사였던 김상은 원래의 좁은 물길 옆에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큰물에 대비했다. 석서의 원 뜻은 ‘물로 만든 물소’라는 것이다.

유서 깊은 뜻이 깃든 이곳 양파정에서 설강(雪崗) 김태오는 문학, 동요를 매개로 민족운동을 전개한다. 그를 일컬어 광주 근대문학을 열어간 시인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것은 그런 연유다. 김태오는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로 시작되는 ‘강아지’와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로 시작되는 ‘봄맞이 가자’의 동시를 지었다.

‘강아지’ 악보.
사실 양파정은 소년운동의 태동지이기 전에 문인들의 교유의 공간이었다. 매년 전국 한시대회가 열렸고 자연스레 대회를 계기로 양파정 시단이 형성되었다.

한편으로 어른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시문을 지었던 이곳에 일련의 소년들이 드나들며 소년운동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19년 3·1운동 자장이 아직 남아 있던 즈음 김태오(1903~1970)는 그렇게 광주에서 소년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이동순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광주문학 100년’(심미안, 2016)에서 이렇게 말한다. “김태오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광주의 민족운동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의 민족운동은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하의 소년운동은 항일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운동이 전개된 데에는 일찍이 근대교육을 받은 덕분에 주체적인 자질을 갖춘 것이 큰 영향을 발휘했다.”

당시 소년운동이 소년회를 비롯해 독서회, 야학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었던 것은 문화와 민족정신이 결부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태오가 양파정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소년운동은 국내 소년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김태오는 윤극영 등과 함께 ‘조선동요연구협회’를 창립해 활동하는 등 동요 이론가와 동요작가로서도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소년운동 전개와 아울러 시와 동요의 창작활동은 결국 민족운동으로 수렴되었다. 그의 ‘설강 동요집’(한성도서, 1933)은 한국아동문학사 가운데 3번째로 발간된 창작집이다. 모두 76편 동요와 ‘동요작법’이 부록으로 실렸다.

사직동 통기타 거리.
김태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동요를 왜 쓰는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조선의 농향(農鄕)을 노래하기에 힘썼다. 특히 어린이 세계에 있어서 많이 노래하였다. 그것은 가난하고 설음 많은 우리 농향(農鄕)의 어린이들을 어떠한 방법으로써 앞길을 열어줄까 함이 그 선결 문제가 됨으로 서이다.(중략) 그리하여 나는 이 흙냄새 나는 노래들을 적은 정성으로나마 여러 해를 두고 모아서 우리 조선의 소년소녀에게 ‘선물’로 바치는 것이니 이 속에 담은 사상, 감성, 언어가 우리 민중의 말과 같이 울리는 것이 된다면 이 어째 다행이 아니랴!”

양파정(楊波亭)에서 빛을 생각한다. 양파정에 올라 볕과 빛을 떠올린다, 수목 사이로 비쳐든 볕은 아직은 한기가 남아 있다. ‘볕’ 양(陽)이 아닌 ‘버드나무’ 양(楊)인 것은 예전에 광주천 인근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스한 봄기운을 타고 진한 흙냄새가 부드럽게 밀려온다. 흙냄새로 은유되는 농향(農鄕)은 “사상, 감성, 언어가 우리 민중의 말과” 함께하는, 설강이 상정하는 글의 정신임을 알 수 있다. 농향에 담긴 남도애와 민족애, 그리고 조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인 것이다.

설강은 또한 동요집 머리말에서 “여기에 있어서 흙(土)을 기조로 한 새로운 글! 예술적 향기가 풍부한 노래, 건전한 노래, 굳센 지도성을 가진 흙의 문예를 요구한다”며 “물론 향토동요(鄕土童謠) 전원시(田園詩)는 그 일부분이 될 것”이라고 설파한다.

정자 주변은 단아하면서도 고즈넉한 풍경의 맛이 배어나온다. 정내는 단출하면서도 고상미가 깃들어 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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