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더니… - 송기동 문화2부장·편집국 부국장
2025년 02월 26일(수) 00:00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 am not a crook).” 1973년 11월 17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TV 연설에서 한 말이다. 1년 5개월 전 워싱턴 포스트 보도로 알려진 민주당 전당대회 사무실 도청 사건(워터게이트 사건) 의혹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이었다. 1968년 대선에서 간발(0.7%)의 차이로 당선된 닉슨은 4년뒤 치러진 대선에서는 압도적인 지지(60.7%)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단순 절도사건 정도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처음에 닉슨은 이를 부정하고 은폐하려 했다. ‘딥 스로트’(Deep Throat)로 불린 내부고발자의 제보를 받은 두 기자(밥 우드워드·번스타인)의 끈질긴 취재로 점점 궁지에 몰렸다. 그러자 CIA에 FBI 조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고 법무부장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요구하는 무리수를 뒀다. 특히 사건 은폐의 결정적 물증인 백악관 내부 녹음 테이프를 탄핵 청문회에 제출하지 않고 버텼다. 연방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제출된 테이프를 통해 대통령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결국 악화된 여론 속에서 의회가 탄핵절차에 들어가자 닉슨은 자진 사임했다.



대통령의 위증과 은폐, 거짓말

50여 년 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건 실체를 가리기 위한 대통령의 위증과 은폐 그리고 사법방해와 권력남용, 의회모독…. 현재 우리 상황과 너무나도 오버랩 된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을 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어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 변론이 열렸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부터 84일,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로부터 73일만이다.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심판 최후 진술을 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집무실에서 취임 2주년 회견을 했다. 이때 책상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명패를 두고 일하고 있음을 기자들에게 보여줬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3년 5월 방한했을때 선물한 명패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11차례의 탄핵변론 과정에서 명패에 적힌 문구와 같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말은 없었다. 12·3 비상계엄을 주도했음에도 모르쇠 답변으로 일관하고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진과 여당, 변호인들도 경고성 계엄, 내란 프레임이라며 옹호했다. 대통령은 국회 봉쇄와 의원 체포를 두고 “지시하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현장에 투입된 군 지휘관은 “지시를 받았다”고 ‘그날’의 팩트를 정직하게 증언했다.

지난 13일 열린 8차 탄핵변론.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은 정형식 헌법재판관의 “국회 본청 내부로 진입해서 국회의원들을 외부로 끌어내라는 (수방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그렇습니다”고 답했다. 대통령 변호인 측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허위로 진술하고 있다’, ‘의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라는 이의제기에는 이렇게 분명하게 밝힌다.



‘그날’의 진실과 간신배들

“저는 의인도 아닙니다. 저는 1경비단장으로서 제 부하들의 지휘관입니다. 제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제 부하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체 거짓말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그때 제가했던 역할들을 진술할 뿐입니다.”

탄핵심판 방송을 보다 보면 영화 ‘라쇼몽’(羅生門·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이 연상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작가의 1915년 작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흑백영화로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을 두고 법정에서 제각기 다른 진술을 하는 네 사람(산적, 부인, 무사, 나무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 결국 각자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은 왜곡된다.

시민들은 12월 3일 늦은 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어 소총을 든 수백 명의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본관 유리창을 깨고 진입하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내란 불면증’을 앓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최종 변론이 끝남에 따라 이제 헌법재판소의 선고만 남았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거짓말과 꼼수는 결국 언젠가는 드러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가까운 미래, 역사학자는 12·3 비상계엄과 헌재 탄핵심판 변론 항목에 누가 간신(諫臣)이었고 간신배(奸臣輩)였는지를 청사(靑史)에 기록할 것임을…. 답은 하나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740495600780479085
프린트 시간 : 2025년 04월 30일 17: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