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부둥켜 안는 것- 박지인 조선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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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이렇게 가까운 것인지 몰랐다. 내가 겪은 죽음은 오래된 건물에 설치된 임시 벽 너머였다. 그때 나는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설레면서도 긴장했다. 잘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은 나에게 아주 먼 얘기였고, 내가 겪기엔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다.
자취를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 노후화된 건물이라서 그런지 집에 누수가 생겨 집을 비우고 본가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몇 주 지나 필요한 짐을 챙기러 자취방에 들렀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순간부터 풍기는 냄새와 집 안에 갑자기 생겨난 벌레들에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하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옆집에 사는 청년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어진 장마와 높은 기온에 부패가 심했다. 예상은 했지만, 상황이 닥치니 놀라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최초 발견자로 진술하고 나서 짐을 챙겨 본가로 돌아왔다. 그렇게 여름방학은 흘러갔다.
그날 이후 그해 여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근로 장학 활동을 하느라 반복적으로 출퇴근만 반복했고 조금 여유가 생기는 날엔 잠만 계속 잤던 것 같다. 조금이나마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서 느낀 후유증이었다. 사실 이웃 간의 따스한 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같은 벽을 공유하며 가장 가까이 사는 옆집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이에게 친절히 다가가 인사를 나누기엔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떠난 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죄책감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발견했으면 그가 덜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해가 지났고 그 일에는 무뎌졌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보는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동시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있으려면 살아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자신을 벼랑 끝에 내몰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이 세상에 쓸모를 찾지 않아도 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은 사실 누구보다 간절히 삶을 부둥켜안고 있을 수 있다.
자살은 ‘충동적 선택’이 아니다. 그 생각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알아챌 수 있는 건 오직 우리의 눈길과 관심이다. 물론 자신의 마음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재를 살아가느라 나 자신을 살펴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의 고통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든지 아직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에서 시작됐다든지 그 원인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왜 시작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 불행해야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울감과 불안감의 증상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극복하기엔 버거울 수 있다. 병원이나 약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로 주변을 잘 살피고 곁에 머무르는 것이 힘든 날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의지해야 한다.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라기에 서툴게 진심을 전한다. 한때 짧게나마 같은 벽 하나를 공유했던, 이젠 세상을 떠난 이웃과 스크린 너머로 응원하던 배우의 명복을 빈다. 부디 안온하길 바란다.
자취를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 노후화된 건물이라서 그런지 집에 누수가 생겨 집을 비우고 본가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몇 주 지나 필요한 짐을 챙기러 자취방에 들렀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순간부터 풍기는 냄새와 집 안에 갑자기 생겨난 벌레들에 이상함을 느꼈다.
여러 해가 지났고 그 일에는 무뎌졌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보는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동시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있으려면 살아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자신을 벼랑 끝에 내몰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이 세상에 쓸모를 찾지 않아도 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은 사실 누구보다 간절히 삶을 부둥켜안고 있을 수 있다.
자살은 ‘충동적 선택’이 아니다. 그 생각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알아챌 수 있는 건 오직 우리의 눈길과 관심이다. 물론 자신의 마음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재를 살아가느라 나 자신을 살펴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의 고통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든지 아직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에서 시작됐다든지 그 원인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왜 시작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 불행해야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울감과 불안감의 증상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극복하기엔 버거울 수 있다. 병원이나 약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로 주변을 잘 살피고 곁에 머무르는 것이 힘든 날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의지해야 한다.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라기에 서툴게 진심을 전한다. 한때 짧게나마 같은 벽 하나를 공유했던, 이젠 세상을 떠난 이웃과 스크린 너머로 응원하던 배우의 명복을 빈다. 부디 안온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