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광주 침공-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02월 24일(월) 00:00
애인 한 명 누구나 몰래 숨겨두고 싶지요. 보물처럼, 사춘기 때처럼 남몰래 짝사랑한 사람 하나 숨겨두고 싶지요. 가질 수는 없지만 간직하고 싶은 사랑 말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내 등을 감싸줄 애인 하나 몰래 두고, 사부자기 바라보고 싶지요. 특히 외로울 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런 사람 하나 두고 싶지요.

그런 애인,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나를 가장 속 깊이 알고 있는 나를 쏙 닮은 누군가 말입니다.

대부분 누군가로부터 사랑 듬뿍 받고 싶지요. 부모에게 사랑받는 아이, 선생님께 귀염받는 학생, 사장님에게 인정받는 사원, 좋은 독자들로부터 호평받는 작가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파란 사랑이 빨갛게 익을 때까지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모난 돌이 세파에 휩쓸려 조약돌이 되듯, 사랑도 반질반질 시간과 더불어 여무나 봅니다.

딸이 분가했습니다. 잘 살기를 바라며 딸의 등 뒤에서 너의 편이 되겠다고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이별이 더 큰 사랑, 지켜주는 사랑이 되기도 하나 봅니다.

희끗희끗해진 자분치를 보면서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걸 알고, 낮게 몸을 숙였습니다. 나를 낮추는 그 순간, 작은 개미라도 밟지 말아야겠다는 마음, 누군가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 애인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쑥쑥 돋아났습니다.

지난 주말, 금남로에 수많은 성조기와 깃발들이 나부꼈습니다. 자기들을 지지해 달라고, 점령군처럼 스피커를 요란하게 틀어놓고 떠드는 소리에 고막 터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부족한 게 있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랑 없는 그런 사람들이 누구를 껴안을 수 있을까요. 사랑은 강요도 협박도 아니랍니다. 당신들이 타고 온 교회 버스, 거기에 쓰인 문구에는 소리치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온유하고 참고 견디는 것, 기다리고 믿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침략자들처럼 정복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요. 그 금남로에서 45년 전 쓰러져간 고인들의 애인이 먼저 되었으면 어땠을까요.

곡창지대였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너무 가혹하게 수탈당해서 항일정신도 강하고 개혁 의지도 강합니다. 그 후로는 아이러니하게 먹고살 것을 찾아서, 서울로 대구 부산으로, 울산 창원으로 떠났습니다. 지금 호남에는 100만명이 넘는 도시는 딱 한 곳, 이곳뿐입니다. 더는 잃을 것이 없어서 좋은 세상 좀 만들어 보자는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짓밟고 점령하고 싶었는지요.

사랑을 동사라고들 합니다. 형태를 바꾸지요. 뜨거운 우정도 이성 간의 사랑도 어느 순간 무덤덤해지거나 미움으로 바뀌곤 합니다. 그래서 동사라고 하나 봅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체언 즉, 명사랍니다. 속인들의 사랑과 달리,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사랑, 울고 있는 아이를 보듬을 수 있는 인류애는 변하지 않는 뼈입니다. 금강석보다 더 단단해서 결코 활용하는 법이 없답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한 예수의 사랑, 그런 명사를 외면하고 마치 유효기간이 지나 변하면 버리는 그런 동사만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손님 없는 가게에 들러 국밥 한 그릇 먹고, 최고입니다. 엄지척도 해주세요. 그게 사랑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애인도 되고, 고단하게 귀가하는 회사원의 그림자도 되어 주십시오. 병원에서 힘들게 견디며 한숨짓는 환자, 늦은 밤까지 가게 문을 닫지 못하고 고심하는 상인들, 직업소개소를 기웃거리는 일일 노동자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을 위해 눈길도 주고 태극기는 그런 곳에서 힘차게 흔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누군가의 애인이었기에 지금 잘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도움과 사랑을 받았기에 지금 존재하고 또 이곳까지 왔을 겁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게 사랑이라는 그 말을 굳게 믿으며 남의 사랑을 앗아가기보다 각각의 사랑을 존중해주면서, 누군가의 애인이 되어, 작은 사랑에 집착하지 말고 커다란 사랑을 실천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그 따뜻한 손길과 우리의 늡늡한 사랑이 합쳐져 서로의 애인이 되어 함께 하는 세상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기꺼이 우리 서로, 정다운 말동무, 다정한 애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지칠 때, 내 등을 감싸줄 애인 한 명, 그 사람이 당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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