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20> ‘하얼빈’
희미한 박명 뒤로한 채 빙판을 걷는 자, 광복의 ‘빛’ 간직하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거사 일대기
현 빈·박정민·이동욱 등 라인업
개봉 1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광복 80주년 앞두고 의미 되새겨
2025년 01월 09일(목) 19:20
영화 ‘하얼빈’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면서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작품 초입과 말미에 등장해 이목을 끈 얼어붙은 두만강 씬.
희미한 박명을 뒤로한 채 빙판을 걷는 자, ‘늙은 늑대(이등박문)’를 처단하려 두만강을 건너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의 모습이다. 만인의 ‘영웅’은 쓰러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며 위태로운 시대를 횡단해 간다.

영화 속 장면은 어두운 감각으로 수렴한다. 순사를 피하던 모던보이의 분투도, 페도라를 눌러쓴 채 연초를 태우던 순간도 모두.

그러나 거사를 도모하던 의인들의 안광만은 빛나던 ‘하얼빈’은 그런 영화다. 우민호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초점화한 이 작품은 시대 배경을 반영해 캄캄한 미장센으로 구현했지만, 이면엔 광복의 ‘빛’이 드리워져 있다.

9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하얼빈’은 개봉 16일 연속 1위를 기록했으며 누적 관객 수 382만 명을 웃돌고 있다. 광복절 80주년을 앞두고 있다는 점 외에도 하수상한 시기와 맞물려 인기를 끄는 것으로 보인다.

담배, 연무, 술과 총… 영화를 채운 오브제 대부분은 시대상을 대변하듯 차갑고 어두운 것들이다. 대한 의군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영화는 거사 10일 전부터 당일까지 역순행하는 전개를 차용했다. 과거 회상은 흑백 컷으로 처리해 시간 흐름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안중근(현빈 분)과 대한 의군은 하얼빈역에 잠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 부인(전여빈), 이창섭(이동욱) 등은 영웅이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영화 제목이 ‘안중근’이 아니라 ‘하얼빈’인 것은 모두가 주역이라는 점 때문이다.

극적 긴장의 순간은 일본군 장교 모리 다쓰오(박훈)와의 조우였다. 안중근의 거사를 막기 위해 밀정과 연계된 그는 상영 내내 관람객에게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이등박문 역을 맡은 일본의 연기파 배우 릴리 프랭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극중에서 “(조선인들은)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라며 의문을 품는다. 단순히 원수의 독백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하얼빈’이 승리한 역사를 증언하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 의군 우덕순(왼쪽)과 김상현. 우덕순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던 실존 인물임과 달리, 김상현은 독립운동가 김기룡과 엄인섭을 합해 재탄생했다.
다양한 인물들이 스크린을 장식했지만 ‘씬스틸러’는 단연 조우진이었다.

갈지자 선로를 꺾어 들어가며 기차가 칸칸이 굽이치는 대목부터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구한말 독립운동을 모티브 삼은 ‘영웅’이나 ‘밀정’과 대별되는 긴장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사실을 가공한 팩션(Faction)이라 하더라도 과거사를 투시한 작품은 큰 틀에서 변모하기 어렵다. 작품의 차별화를 위한 감독의 고민은 특별 출연한 박점출(정우성)이 사막에서 폭약을 내어주던 장면, 나아가 설원과 빙상 촬영 씬 등 수려한 영상미에서 빛이 났다. CG를 최소화는 대신 실제 공간에서 촬영한 덕분에 자연 풍광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영화는 초인적인 영웅이 아닌 이름없는 민초들의 활동을 부각시킨다. 한 사람의 영웅보다 다수의 ‘영웅들’에 초점을 맞춘다.

안중근이 일본 장교 다쓰오를 놓아준 사건은 얼마 후 동료들을 사지로 내모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에 안중근은 두려움에 떨다 바닥에 주저앉는데, 관객에게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쳐진다. 심지어 동지에게 힐난을 당하거나 작전에서 밀려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말미에 밀정이 개심해 의군으로 합류한 것은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결기로 인해서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일본군을 기습한 안중군과 의군들.
이등박문 가슴에 총탄을 쏜 뒤 “까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라는 안중근의 외침이 하얼빈 역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소처럼 잡혀 나가는 그의 모습은 먹먹함과 비장함을 준다.

이튿날 ‘대동공보’ 발행인 이강(안세호)은 이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암살 대신 ‘척결’이라는 표현을 쓴다. 실제 ‘대동공보’는 1908년 러시아 교포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 기관지로 창간됐다.

작품은 안중근은 물론 폭약을 내어주길 고민하던 박점출, 변절자를 처단하려다 주저한 동료들, 배신했다 팀에 합류한 밀정까지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낸다. 결국 인간의 입체적인 면 또한 역사를 진전시키는 단초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의미는 깊다.

한편 초입과 끝, 꽁꽁 언 두만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구성의 묘도 돋보였다. 인간 안중근의 번뇌, 비탄을 이미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구현한 영상미학도 인상적이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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