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서 컨설팅까지…지역기업 글로벌 진출 버팀목 역할”
[광주일보가 만난 경제인] 이춘재 한국수출입은행 광주전남지역본부장
급증하는 김 수출 뒷받침 위해 내년 초 목포 수출지원센터 신설
최신 업계·시장 동향 점검하고 대책 제공하는 지자체 역할 중요
급증하는 김 수출 뒷받침 위해 내년 초 목포 수출지원센터 신설
최신 업계·시장 동향 점검하고 대책 제공하는 지자체 역할 중요
![]() |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유럽의 선진국들은 한 시대 세계 무역을 재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 지중해, 북해, 대서양, 태평양 등 해양시대를 열며, 중세 이후 최소 수 백년 동안 지금의 부를 이룩해냈다. 상호 무역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시작한 이들은 대항해에 나서 식민지들을 개척하고, 농산물에서 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물들을 본국으로 끌어와 중흥기를 열었다.
10세기부터 지중해를 오가는 해상무역을 장악한 것은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 피사 등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이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유럽,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이슬람국가 등과 교역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제노바는 나침반과 대규모 선박 건조 기술로 1291년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인 지브롤터해협을 거쳐 북해로 가는 해상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13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는 독일의 뤼베크, 함부르크, 쾰른, 브레멘 등 한자동맹 도시들이 정치·경제적인 연합체를 구성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대항해시대는 유럽의 소국 포루투갈이 열었는데, 이후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로 개척에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계 곳곳의 드넓은 식민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16세기 후반부터 인적·경제적 자원이 풍부해지면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상인들이 국가와 공동출자해 선단을 구성하고 해외무역 독점을 시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서인도회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절대군주의 중상주의가 모습을 드러내고 중앙은행으로 대표되는 국가독점체제가 만들어졌다. 18세기 대서양이 중심이 되며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의 삼각무역이 부상하고, 영국 런던이 그 심장부가 되었다.
1000여년에 걸쳐 유럽 국가들이 얻어낸 경제 성장이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80년도 안 돼 실현되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부러움, 새로움, 대단함 등이 담겨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세계 유례가 없는 압축 고도 경제 성장에 이어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열풍은 모두 수출의 힘이다. 다른 국가가 필요로 하거나 사고자 하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이를 항공·선박 등을 통해 운송할 수 있는 능력, 혁신을 통해 꾸준히 그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수출은 생산·부가가치·고용 유발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국내 경제 성장을 주도하였다. 2023년 실질경제성장률 1.36% 중 수출기여도가 무려 1.17%p로 전체 경제 성장의 86.1%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수출액 비중 역시 35.7%에 달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의 보고서 ‘2025년 경제·산업 전망’은 올해 수출액은 전년대비 8.4% 증가한 6855억 달러, 내년에는 2.2%가 더해져 700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바이오헬스, 조선, 철강, 자동차, 정유 등이다.
1970년 수출액은 8억3000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54년만에 수출액은 826배 급증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폭발적인 수출 성장을 이끈 기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국수출입은행이다. 1976년 7월 법정자본금 1500억원에 설립, 이제 막 세계 진출에 나선 조선업체들의 지원부터 시작했다. 1971년 10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형 조선소 사업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4300만 달러를 해외에서 조달한지 5년만이다. 당시 정 회장은 영국 런던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만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추천서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차관 제공 결정을 받아냈다. 대규모 비용이 수반되는 조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기로 하면서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최초로 수출 관련 국책은행을 만든 것이다.
이후 중동건설 붐에 따라 해외건설과 플랜트 수주를 지원했으며, 최근에는 방산, 원전, 고속철 등 초대형 해외 사업 수주 지원부터 반도체, 미래모빌리티, 배터리 등 첨단기술 분야 지원, 중소중견기업 수출 우대 지원 등 우리나라 수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기업의 수출과 수입을 위한 자금, 관련 시설투자 자금, 해외진출을 위한 자금 지원 등 기업들의 자금 수요에 맞춤형으로 저리의 경쟁력 있는 자금을 제공하고, 기업들이 국제 비즈니스에서 필요한 입찰보증, 선수금환급보증, 계약이행보증, 하자보증 등 다양한 이행성 보증에 대해서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수출신용기관(ECA)으로서, 자체 자금과 정부로부터 위탁 받은 대외경제협력기금(개도국 차관 지원), 공급망안정화기금(글로벌 벨류체인 공급망 안정적 관리) 등을 연계 지원하고 있어 수혜 기업들이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기업 자체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개도국에도 네트워크를 광범위하게 운용하고 있어 시장 개척을 바라는 기업들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국내에 서울 본점과 10개 지점, 3개 출장소, 국외에 25개의 사무소와 5개의 해외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광주·전남에는 광주지점, 여수출장소 등이 있으며, 이춘재(57) 본부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순천고,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고시를 준비하다 1993년 12월 입행했다. 자금시장단, 중소기업수출금융부 등 주요 부서를 거쳐 2002년부터 2년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서 파견 근무를 했으며, 전대금융부장, 여신감리부장 등 여러 자리를 경험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수도권, 영남권, 충청권 등에 비하여 산업 기반이 취약한 이 지역 기업들이 수출을 통해 세계 시장에 보다 적극적으로 진출하도록 철저한 뒷바라지를 다짐하고, 직접 현장에서 기업 대표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본부장은 전남도의회 제11대 전반기 의장을 지낸 광양 출신 이용재 전 전남도의원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지역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그동안 쌓은 능력과 지혜, 노하우를 쏟고 싶다는 그에게 지역 수출 진흥 방안, 기업 지원 대책, 지자체에 바라는 점, 지역 경제 성장을 위한 조언 등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 7월 9일 취임 이후 5개월여만에 벌써 성과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7월 인사발령으로 지역을 잘 알고 있고,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내려오게 됐다. 앞으로 한국수출입은행의 다양한 제도, 사업들을 광주·전남지역 기업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통해 효과를 극대화시켜 보겠다고 각오했다. 기아자동차, 광주글로벌모터스 협력업체, 삼성전자 협력업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업 CEO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지원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K-푸드의 열풍 속에 김 수출이 급증하고 있어 2025년 초 목포에 수출지원센터를 신설해 김 관련 기업들도 뒷받침할 예정이다. 이들 기업들을 앵커기업으로 키워내고 그 효과가 확산되어 일자리 창출, 관련 기업 신규 창업 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 현대기아차 협력업체인 DH오토웨어는 멕시코에 공장을 지어 현대차그룹 뿐만 아니라 추후 테슬라 등 다른 외국기업에도 자율주행 통신부품 등을 공급할 계획인데, 그와 관련된 지원을 위해서 본부 차원에서는 현지 출장도 다녀왔다.
=광주에 처음 근무해보는데.
▲부임한 뒤 인사를 다녔더니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주시고, 몇몇은 벌써 호형호제하면서 서로 챙겨주시는 등 격의없이 잘 대해주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모임도 가급적이면 다 나가서 수출입은행의 기능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있다. 어떤 일이든 챙겨서 임팩트 있게 일을 해보려 노력중이다.
=벌써 지역기업들에 대해 상당히 파악이 된 느낌이다.
▲(손사래를 치며)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우선 본부 차원에서는 HD현대삼호 등 조선업의 비중이 크다. 조선업에 대한 지원을 위해 수출입은행이 설립된만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할 대상이다. 자동차 차체 부품 전문업체인 (주)호원은 튀르키예에 진출해서 기반을 잘 다지고 있고, 포드나 터키 자동차 브랜드인 토그 등 외국계 자동차 브랜드에도 부품을 공급하기 위해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군 전술차량을 만드는 코비코(주)는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직수출을 위해 이번에 신설 공장을 짓기로 했다. 제가 부임하고 나서 광주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는 기업 대표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출장간다고 해 현지 수출입은행 사무소장과 면담을 주선한 적이 있다. 이 기업은 소장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케냐와 콜롬비아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제가 하는 일이 적극적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지역 기업들을 돕는 일이다.
=지역기업에 대한 지자체의 대처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던데.
▲지자체의 업무 가운데 점차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지역경제 관련이다. 투자 유치부터 창업 지원, 지역 산업 성장 관리, 일자리 창출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다. 따라서 지자체는 산업과 시장의 변화 동향을 잘 읽어 세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정보를 축적해 미래 성장할 고부가가치 산업을 지역에 유치하도록 기업들을 설득하고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공무원과 분야별 민간 전문가들이 팀을 구성해 최신 업계 및 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좀 들어달라.
▲삼성전자 광주공장의 일부 생산 라인의 해외 배치가 최근 지역 기업들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반복된 사례이기 때문에 광주시가 기업과 상시소통 채널을 구축, 애로와 건의사항을 선제적으로 파악해 삼성전자측에 요청할 필요가 있다. 제 생각에는 역으로 트럼프의 관세폭탄 우려에 따라 중국에 진출한 일렉트로룩스, 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의 프리미엄 물량을 광주의 가전 제조기반에 끌어들이는 역발상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업은 미국의 리만브라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지난 2008년 이전 수년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이때 각 지자체들에서 조선소 유치 바람이 불었고, 수출입은행에도 지원 요청이 쇄도한 바 있다. 조선업은 항상 경기변동 사이클을 타는데, 이미 세계적으로 생산시설이 포화 상태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광·신안·진도·해남 등 곳곳에 조선소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현재 지역의 조선업 상황을 보면 HD현대삼호는 논외로 하고 대한조선 하나가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분주한 형국이다. 대한조선은 선종을 단순화해서 반복건조로 노하우를 쌓고 원가를 낮춰서 생존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산업은행이 대우조선과 대한조선을 함께 관리하여 대우조선이 대한조선에 일부 유무형 지원을 제공하게 했던 것도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자체, 정부가 앞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이 있다면.
▲가장 먼저 전남의 풍부한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해 반도체 공장, 데이터센터 등을 유치하는 것이다.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시설들이 RE100 이슈로 인해 신재생 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사용해야 하고, 전남은 해상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생산량이 급증할 예정이다. 수도권 송전망은 막대한 비용과 민원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침 분산에너지 특별법이 제정·시행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최근 일본·미국의 한적한 시골에도 TSMC, 삼성 등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데, 광주·전남에는 대학이 곳곳에 있어 인력 공급 문제도 없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기업들의 ‘단기적 이익 추구형 투자’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체계적으로 기업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지역 내 관련 인프라를 확충해 반도체 공장과 같은 앵커기업을 유치하게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인 수도권 집중 완화가 가능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서울에 견줘도 손색이 없는 거점도시를 호남과 영남에 1곳씩 지정하고 획기적으로 투자해 청년들이 살고 싶은 경쟁력을 갖추도록 추진했으면 좋겠다.
=요즘 여수의 석유화학산업, 광양의 철강업의 분위기가 어둡다.
▲공감한다. 굴뚝산업으로 분류되는 석유화학, 철강산업이 안주해서는 안 된다. 당장 중국의 석유화학, 철강 제품이 시장에 쏟아지고, 중동 산유국들이 최근 수년간 막대하게 투자한 석유화학 플랜트들에서 저렴한 제품들이 쏟아지면 관련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되어 구조조정 이슈가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수·광양에서 막대한 이익을 본 주력 기업들이 다른 지역에 첨단제조공장을 설립하는 움직임을 우선 막아야 하며, 추가 투자를 통해 기업 혁신에 나서도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자체뿐만 아니라 지역 정치권, 상공회의소 등이 합심해 추가 투자 유치를 받기도 했다. 또 수년 전 포스코가 지주사 포스코홀딩스를 설립할 때 포항·경북지역에서 강력히 요청해 서울을 포기하고 포항에 설립한 적이 있다. 당시 광양은 포스코 퓨처엠 본사라도 유치하려고 했는데, 주력공장이 광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퓨처엠 본사는 여전히 포항에 있다. 광양에서 창출되는 포스코그룹의 수익이 포항보다 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R&D와 관련된 포스텍도 포항에 있고 주요 의사결정 기능들이 모두 포항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답변에 고향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없는가.
▲앞으로 영광에서 여수에 이르는 서남해안에 다수의 풍력발전 프로젝트가 추진될 것이다. 이를 연관 제조업 유치에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역기업이 건설 과정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풍력 발전에 필요한 기자재 리스트를 만들어 지역 생산 기자재 비중을 일정 비율로 지정해 신규 풍력발전 인허가를 내주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규범을 지키면서도 풍력 발전 관련 기업들이 광주·전남에 기반을 갖추도록 해야 하며, 침체 위기에 있는 지역건설업들에게도 활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 개발도상국들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에서 글로벌 기업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인데, 이 지역이 이를 적극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또 수도권·영남권 소재 기업인들이 광주·전남에 대해 강성 노조가 있고 기업에 대하여 부정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실상은 HD현대그룹 소속 조선 3개사 가운데 HD현대삼호의 수익이 가장 크고, 포스코에서도 광양제철소가 차지하는 수익 비중이 높다, 기아차 광주공장도 굉장히 좋은 운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잘 홍보 마케팅해서 광주·전남에 투자하면 성공한다는 인식을 외지 기업인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 수출입은행 여수출장소를 폐지하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상공회의소를 포함해 지역경제단체, 지자체, 지역정치권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지역 내에 있는 시설이나 기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유지·보존하려는 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이야기만 숨가쁘게 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광주에 근무하는 동안 현재·미래의 성장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반도체, AI, 제약바이오, 이차전지 등과 관련된 서적 몇 권을 구입해 시간이 날 때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산업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인사이트를 얻어볼 생각이다.
=상당히 꼼꼼하고 전략적이다. 주식 투자도 잘 할 것 같다.
▲(웃으며)주식 투자해서 손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큰 수익을 낸 적도 물론 없다. 한 번 사면 4~5년 동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은 매일 쳐다보는 주식투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본질적인 가치를 보고 기다리면 복구할 기회가 온다. 이는 제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외국 근무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던데.
▲지난 2002년부터 2년간 국제기구인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 근무한 것은 개인적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EBRD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시장경제 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1990년대 초에 런던에 설립한 국제기구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발틱 3국 등을 담당하는 센트럴 유럽팀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내부 업무처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함께 경험하고, 주요 프로젝트들을 세계적 기업, 로펌 등과 추진하면서 상대를 이해하고 협의를 원활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2년간의 경험이 지금 제 업무 방식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후배가 스스럼없이 업무에 대해 논의하고, 상사의 승인도 격의없이 이뤄지며, 난상토론 방식의 회의를 거쳐 결정되면 모두가 따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리스크 관리는 합리적으로 접근한다. 제가 볼 때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감사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회의가 너무 형식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안되는 경향이 있게 된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오히려 중요한 대화를 나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투자가 있다면.
▲사람에 대한 투자다. 사람을 만날 때 진실되게 관계를 가져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어서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친구, 직장 선후배들과 상당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잘한 투자라면 역시 아내다. 서울시 공무원인 아내가 이춘재의 최고 컨설턴트로, 어려워하는 이슈들을 들어주고 솔직하게 의견을 제시해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제 생각이 정리되는 효과도 있어 아내와의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사실 외국 근무할 때마다 휴직하고 함께 나가다보니 승진이 늦어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딸이 둘 있는데, 큰 딸은 IT기업, 둘째딸은 국세청 7급 공무원으로 모두 잘 키워준 것도 감사하다.
=정말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들었다.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아침을 좀 일찍 시작한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테니스를 하고, 영어회화 앱으로 매일 30분씩 영어 공부를 한다. 카투사 복무, 외국 근무 등을 통해 영어에는 좀 자신이 있는데,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껴 더 유창하게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2년째 하고 있다. 앞으로 기업 컨설팅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데, 그 때 유용하게 쓸 생각이다.
=MZ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젊은 세대도 내적 갈등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유복하게 자랐고 교환학생, 유학 등 해외 경험도 해봐 더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SNS 소통에 능한 반면 대면 소통이 좀 취약한 것 같다. 친구, 선배, 동료, 후배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살펴 시각을 두루 넓히고 인간관계를 잘 만들기를 조언하고 싶다. 또 너무 핸드폰만 보지 말고 혼자 생각해보고, 사색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사실 선진국들의 과학, 철학의 업적은 이러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 경제가 앞으로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역동적 성장 이유로 ‘잘해보자’는 욕구를 들고 싶다. 시스템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은 결과 지향적인 입시제도, 강한 동기와 집념 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이러한 의지가 약해지고, 개인 권리 중시, 경쟁 회피, 목표 의식 상실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 역시 소중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기업과 국가 경쟁력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강한 추진력도 보여줘야 한다. 신상필벌과 공정한 평가에 따른 혜택 배분도 보다 철저하게 이뤄졌으면 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혁혁한 성과를 낸 경우 충분한 보상이 이뤄져야 젊은이들도 일할 동기가 생길 것이다.
=지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나라 경제를 주도하는 것이 대기업인데, 광주·전남에 거의 없다. 지금까지 이 지역이 정치적 아젠다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기업을 유치하고 미래 먹거리가 될 첨단산업을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의 균형을 맞췄으면 한다. 지역 청년들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청년들이 정착하도록 모두의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역 대표 제조기업들을 소중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선도하는 앵커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주변의 관련 산업을 키우는 소위 확산 효과가 창출되기를 기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프라 구축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사업을 잘 발굴하고 논리를 개발해 정부·국회를 설득하는 절실한 자세도 갖췄으면 좋겠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서인도회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절대군주의 중상주의가 모습을 드러내고 중앙은행으로 대표되는 국가독점체제가 만들어졌다. 18세기 대서양이 중심이 되며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의 삼각무역이 부상하고, 영국 런던이 그 심장부가 되었다.
1000여년에 걸쳐 유럽 국가들이 얻어낸 경제 성장이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80년도 안 돼 실현되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부러움, 새로움, 대단함 등이 담겨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세계 유례가 없는 압축 고도 경제 성장에 이어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열풍은 모두 수출의 힘이다. 다른 국가가 필요로 하거나 사고자 하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이를 항공·선박 등을 통해 운송할 수 있는 능력, 혁신을 통해 꾸준히 그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수출은 생산·부가가치·고용 유발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국내 경제 성장을 주도하였다. 2023년 실질경제성장률 1.36% 중 수출기여도가 무려 1.17%p로 전체 경제 성장의 86.1%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수출액 비중 역시 35.7%에 달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의 보고서 ‘2025년 경제·산업 전망’은 올해 수출액은 전년대비 8.4% 증가한 6855억 달러, 내년에는 2.2%가 더해져 700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바이오헬스, 조선, 철강, 자동차, 정유 등이다.
1970년 수출액은 8억3000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54년만에 수출액은 826배 급증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폭발적인 수출 성장을 이끈 기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국수출입은행이다. 1976년 7월 법정자본금 1500억원에 설립, 이제 막 세계 진출에 나선 조선업체들의 지원부터 시작했다. 1971년 10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형 조선소 사업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4300만 달러를 해외에서 조달한지 5년만이다. 당시 정 회장은 영국 런던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만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추천서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차관 제공 결정을 받아냈다. 대규모 비용이 수반되는 조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기로 하면서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최초로 수출 관련 국책은행을 만든 것이다.
이후 중동건설 붐에 따라 해외건설과 플랜트 수주를 지원했으며, 최근에는 방산, 원전, 고속철 등 초대형 해외 사업 수주 지원부터 반도체, 미래모빌리티, 배터리 등 첨단기술 분야 지원, 중소중견기업 수출 우대 지원 등 우리나라 수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기업의 수출과 수입을 위한 자금, 관련 시설투자 자금, 해외진출을 위한 자금 지원 등 기업들의 자금 수요에 맞춤형으로 저리의 경쟁력 있는 자금을 제공하고, 기업들이 국제 비즈니스에서 필요한 입찰보증, 선수금환급보증, 계약이행보증, 하자보증 등 다양한 이행성 보증에 대해서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수출신용기관(ECA)으로서, 자체 자금과 정부로부터 위탁 받은 대외경제협력기금(개도국 차관 지원), 공급망안정화기금(글로벌 벨류체인 공급망 안정적 관리) 등을 연계 지원하고 있어 수혜 기업들이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기업 자체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개도국에도 네트워크를 광범위하게 운용하고 있어 시장 개척을 바라는 기업들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국내에 서울 본점과 10개 지점, 3개 출장소, 국외에 25개의 사무소와 5개의 해외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광주·전남에는 광주지점, 여수출장소 등이 있으며, 이춘재(57) 본부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순천고,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고시를 준비하다 1993년 12월 입행했다. 자금시장단, 중소기업수출금융부 등 주요 부서를 거쳐 2002년부터 2년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서 파견 근무를 했으며, 전대금융부장, 여신감리부장 등 여러 자리를 경험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수도권, 영남권, 충청권 등에 비하여 산업 기반이 취약한 이 지역 기업들이 수출을 통해 세계 시장에 보다 적극적으로 진출하도록 철저한 뒷바라지를 다짐하고, 직접 현장에서 기업 대표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본부장은 전남도의회 제11대 전반기 의장을 지낸 광양 출신 이용재 전 전남도의원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지역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그동안 쌓은 능력과 지혜, 노하우를 쏟고 싶다는 그에게 지역 수출 진흥 방안, 기업 지원 대책, 지자체에 바라는 점, 지역 경제 성장을 위한 조언 등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 7월 9일 취임 이후 5개월여만에 벌써 성과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7월 인사발령으로 지역을 잘 알고 있고,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내려오게 됐다. 앞으로 한국수출입은행의 다양한 제도, 사업들을 광주·전남지역 기업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통해 효과를 극대화시켜 보겠다고 각오했다. 기아자동차, 광주글로벌모터스 협력업체, 삼성전자 협력업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업 CEO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지원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K-푸드의 열풍 속에 김 수출이 급증하고 있어 2025년 초 목포에 수출지원센터를 신설해 김 관련 기업들도 뒷받침할 예정이다. 이들 기업들을 앵커기업으로 키워내고 그 효과가 확산되어 일자리 창출, 관련 기업 신규 창업 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 현대기아차 협력업체인 DH오토웨어는 멕시코에 공장을 지어 현대차그룹 뿐만 아니라 추후 테슬라 등 다른 외국기업에도 자율주행 통신부품 등을 공급할 계획인데, 그와 관련된 지원을 위해서 본부 차원에서는 현지 출장도 다녀왔다.
=광주에 처음 근무해보는데.
▲부임한 뒤 인사를 다녔더니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주시고, 몇몇은 벌써 호형호제하면서 서로 챙겨주시는 등 격의없이 잘 대해주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모임도 가급적이면 다 나가서 수출입은행의 기능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있다. 어떤 일이든 챙겨서 임팩트 있게 일을 해보려 노력중이다.
=벌써 지역기업들에 대해 상당히 파악이 된 느낌이다.
▲(손사래를 치며)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우선 본부 차원에서는 HD현대삼호 등 조선업의 비중이 크다. 조선업에 대한 지원을 위해 수출입은행이 설립된만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할 대상이다. 자동차 차체 부품 전문업체인 (주)호원은 튀르키예에 진출해서 기반을 잘 다지고 있고, 포드나 터키 자동차 브랜드인 토그 등 외국계 자동차 브랜드에도 부품을 공급하기 위해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군 전술차량을 만드는 코비코(주)는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직수출을 위해 이번에 신설 공장을 짓기로 했다. 제가 부임하고 나서 광주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는 기업 대표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출장간다고 해 현지 수출입은행 사무소장과 면담을 주선한 적이 있다. 이 기업은 소장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케냐와 콜롬비아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제가 하는 일이 적극적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지역 기업들을 돕는 일이다.
=지역기업에 대한 지자체의 대처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던데.
▲지자체의 업무 가운데 점차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지역경제 관련이다. 투자 유치부터 창업 지원, 지역 산업 성장 관리, 일자리 창출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다. 따라서 지자체는 산업과 시장의 변화 동향을 잘 읽어 세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정보를 축적해 미래 성장할 고부가가치 산업을 지역에 유치하도록 기업들을 설득하고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공무원과 분야별 민간 전문가들이 팀을 구성해 최신 업계 및 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좀 들어달라.
▲삼성전자 광주공장의 일부 생산 라인의 해외 배치가 최근 지역 기업들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반복된 사례이기 때문에 광주시가 기업과 상시소통 채널을 구축, 애로와 건의사항을 선제적으로 파악해 삼성전자측에 요청할 필요가 있다. 제 생각에는 역으로 트럼프의 관세폭탄 우려에 따라 중국에 진출한 일렉트로룩스, 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의 프리미엄 물량을 광주의 가전 제조기반에 끌어들이는 역발상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업은 미국의 리만브라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지난 2008년 이전 수년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이때 각 지자체들에서 조선소 유치 바람이 불었고, 수출입은행에도 지원 요청이 쇄도한 바 있다. 조선업은 항상 경기변동 사이클을 타는데, 이미 세계적으로 생산시설이 포화 상태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광·신안·진도·해남 등 곳곳에 조선소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현재 지역의 조선업 상황을 보면 HD현대삼호는 논외로 하고 대한조선 하나가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분주한 형국이다. 대한조선은 선종을 단순화해서 반복건조로 노하우를 쌓고 원가를 낮춰서 생존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산업은행이 대우조선과 대한조선을 함께 관리하여 대우조선이 대한조선에 일부 유무형 지원을 제공하게 했던 것도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자체, 정부가 앞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이 있다면.
▲가장 먼저 전남의 풍부한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해 반도체 공장, 데이터센터 등을 유치하는 것이다.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시설들이 RE100 이슈로 인해 신재생 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사용해야 하고, 전남은 해상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생산량이 급증할 예정이다. 수도권 송전망은 막대한 비용과 민원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침 분산에너지 특별법이 제정·시행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최근 일본·미국의 한적한 시골에도 TSMC, 삼성 등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데, 광주·전남에는 대학이 곳곳에 있어 인력 공급 문제도 없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기업들의 ‘단기적 이익 추구형 투자’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체계적으로 기업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지역 내 관련 인프라를 확충해 반도체 공장과 같은 앵커기업을 유치하게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인 수도권 집중 완화가 가능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서울에 견줘도 손색이 없는 거점도시를 호남과 영남에 1곳씩 지정하고 획기적으로 투자해 청년들이 살고 싶은 경쟁력을 갖추도록 추진했으면 좋겠다.
=요즘 여수의 석유화학산업, 광양의 철강업의 분위기가 어둡다.
▲공감한다. 굴뚝산업으로 분류되는 석유화학, 철강산업이 안주해서는 안 된다. 당장 중국의 석유화학, 철강 제품이 시장에 쏟아지고, 중동 산유국들이 최근 수년간 막대하게 투자한 석유화학 플랜트들에서 저렴한 제품들이 쏟아지면 관련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되어 구조조정 이슈가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수·광양에서 막대한 이익을 본 주력 기업들이 다른 지역에 첨단제조공장을 설립하는 움직임을 우선 막아야 하며, 추가 투자를 통해 기업 혁신에 나서도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자체뿐만 아니라 지역 정치권, 상공회의소 등이 합심해 추가 투자 유치를 받기도 했다. 또 수년 전 포스코가 지주사 포스코홀딩스를 설립할 때 포항·경북지역에서 강력히 요청해 서울을 포기하고 포항에 설립한 적이 있다. 당시 광양은 포스코 퓨처엠 본사라도 유치하려고 했는데, 주력공장이 광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퓨처엠 본사는 여전히 포항에 있다. 광양에서 창출되는 포스코그룹의 수익이 포항보다 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R&D와 관련된 포스텍도 포항에 있고 주요 의사결정 기능들이 모두 포항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답변에 고향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없는가.
▲앞으로 영광에서 여수에 이르는 서남해안에 다수의 풍력발전 프로젝트가 추진될 것이다. 이를 연관 제조업 유치에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역기업이 건설 과정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풍력 발전에 필요한 기자재 리스트를 만들어 지역 생산 기자재 비중을 일정 비율로 지정해 신규 풍력발전 인허가를 내주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규범을 지키면서도 풍력 발전 관련 기업들이 광주·전남에 기반을 갖추도록 해야 하며, 침체 위기에 있는 지역건설업들에게도 활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 개발도상국들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에서 글로벌 기업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인데, 이 지역이 이를 적극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또 수도권·영남권 소재 기업인들이 광주·전남에 대해 강성 노조가 있고 기업에 대하여 부정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실상은 HD현대그룹 소속 조선 3개사 가운데 HD현대삼호의 수익이 가장 크고, 포스코에서도 광양제철소가 차지하는 수익 비중이 높다, 기아차 광주공장도 굉장히 좋은 운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잘 홍보 마케팅해서 광주·전남에 투자하면 성공한다는 인식을 외지 기업인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 수출입은행 여수출장소를 폐지하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상공회의소를 포함해 지역경제단체, 지자체, 지역정치권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지역 내에 있는 시설이나 기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유지·보존하려는 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이야기만 숨가쁘게 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광주에 근무하는 동안 현재·미래의 성장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반도체, AI, 제약바이오, 이차전지 등과 관련된 서적 몇 권을 구입해 시간이 날 때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산업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인사이트를 얻어볼 생각이다.
=상당히 꼼꼼하고 전략적이다. 주식 투자도 잘 할 것 같다.
▲(웃으며)주식 투자해서 손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큰 수익을 낸 적도 물론 없다. 한 번 사면 4~5년 동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은 매일 쳐다보는 주식투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본질적인 가치를 보고 기다리면 복구할 기회가 온다. 이는 제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외국 근무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던데.
▲지난 2002년부터 2년간 국제기구인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 근무한 것은 개인적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EBRD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시장경제 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1990년대 초에 런던에 설립한 국제기구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발틱 3국 등을 담당하는 센트럴 유럽팀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내부 업무처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함께 경험하고, 주요 프로젝트들을 세계적 기업, 로펌 등과 추진하면서 상대를 이해하고 협의를 원활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2년간의 경험이 지금 제 업무 방식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후배가 스스럼없이 업무에 대해 논의하고, 상사의 승인도 격의없이 이뤄지며, 난상토론 방식의 회의를 거쳐 결정되면 모두가 따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리스크 관리는 합리적으로 접근한다. 제가 볼 때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감사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회의가 너무 형식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안되는 경향이 있게 된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오히려 중요한 대화를 나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투자가 있다면.
▲사람에 대한 투자다. 사람을 만날 때 진실되게 관계를 가져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어서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친구, 직장 선후배들과 상당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잘한 투자라면 역시 아내다. 서울시 공무원인 아내가 이춘재의 최고 컨설턴트로, 어려워하는 이슈들을 들어주고 솔직하게 의견을 제시해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제 생각이 정리되는 효과도 있어 아내와의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사실 외국 근무할 때마다 휴직하고 함께 나가다보니 승진이 늦어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딸이 둘 있는데, 큰 딸은 IT기업, 둘째딸은 국세청 7급 공무원으로 모두 잘 키워준 것도 감사하다.
=정말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들었다.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아침을 좀 일찍 시작한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테니스를 하고, 영어회화 앱으로 매일 30분씩 영어 공부를 한다. 카투사 복무, 외국 근무 등을 통해 영어에는 좀 자신이 있는데,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껴 더 유창하게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2년째 하고 있다. 앞으로 기업 컨설팅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데, 그 때 유용하게 쓸 생각이다.
=MZ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젊은 세대도 내적 갈등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유복하게 자랐고 교환학생, 유학 등 해외 경험도 해봐 더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SNS 소통에 능한 반면 대면 소통이 좀 취약한 것 같다. 친구, 선배, 동료, 후배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살펴 시각을 두루 넓히고 인간관계를 잘 만들기를 조언하고 싶다. 또 너무 핸드폰만 보지 말고 혼자 생각해보고, 사색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사실 선진국들의 과학, 철학의 업적은 이러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 경제가 앞으로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역동적 성장 이유로 ‘잘해보자’는 욕구를 들고 싶다. 시스템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은 결과 지향적인 입시제도, 강한 동기와 집념 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이러한 의지가 약해지고, 개인 권리 중시, 경쟁 회피, 목표 의식 상실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 역시 소중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기업과 국가 경쟁력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강한 추진력도 보여줘야 한다. 신상필벌과 공정한 평가에 따른 혜택 배분도 보다 철저하게 이뤄졌으면 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혁혁한 성과를 낸 경우 충분한 보상이 이뤄져야 젊은이들도 일할 동기가 생길 것이다.
=지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나라 경제를 주도하는 것이 대기업인데, 광주·전남에 거의 없다. 지금까지 이 지역이 정치적 아젠다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기업을 유치하고 미래 먹거리가 될 첨단산업을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의 균형을 맞췄으면 한다. 지역 청년들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청년들이 정착하도록 모두의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역 대표 제조기업들을 소중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선도하는 앵커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주변의 관련 산업을 키우는 소위 확산 효과가 창출되기를 기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프라 구축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사업을 잘 발굴하고 논리를 개발해 정부·국회를 설득하는 절실한 자세도 갖췄으면 좋겠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