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기행-피카소 미술관] 입체주의 선구자 독창적 예술혼 … 눈길 닿는 곳마다 ‘황홀’
카탈루냐·호안 미로와 ‘바르셀로나 3대 미술관’
오랜 친구 사바라테스 제안해 생존 당시 건립
10대~청년기 시절 그린 4200점 상설 전시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58점 오마주
60대 이후엔 도예 관심…접시·물병 전시도
평생 5만여점 남겨…수천여종 아트상품 판매도
2024년 12월 16일(월) 09:00
피카소가 15살 때 그린 ‘첫 영성체’(The First Communion).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에 발을 들여 놓으면 마치 중세시대로 ‘순간이동’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초현대식 건물과 화려한 명품숍들로 활기가 넘친 람블라스 거리와 달리 70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성당과 고성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미로를 방불케 하는 꾸불꾸불한 골목을 거닐다 보면 번잡한 일상에서 탈출한 듯한 편안함이 밀려든다.

그중에서도 피카소 미술관(Museu Picasso)은 고딕지구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다. 13~14세기의 고딕양식 건물은 구 도심의 중세풍 건축물과 어우러져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낸다. 무엇보다 라(La) 리베라 인근의 몬카다 거리에 자리한 피카소 미술관은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호안 미로 미술관(11월30일자 광주일보)과 더불어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3대 미술관이다. 출생지인 스페인 말라가와 활동지였던 파리에도 미술관이 있지만 피카소(1881~1973)의 청소년기 초상화와 청색시대(Blue Period)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세계적인 화가로서 그의 성장과정을 엿볼 수 있는 시기의 4200여 점의 그림을 상설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건립된 미술관(말라가, 파리)과 달리 생존 당시 건립된 유일한 곳이다.

피카소 아카아브
인상적인 건 미술관 외관이다. 20세기 입체파 시대를 연 거장이지만 그의 작품을 품은 건물은 중세시대의 궁전(palace) 5개로 연결됐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에 들어서면 수도원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모던한 인테리어로 마감된 여타 미술관들과 달리 옛 건물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공간 연출은 흥미롭다. 두꺼운 벽돌로 이어진 회랑과 안뜰에서 바라다 보는 하늘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입구를 지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수많은 그림엽서와 스케치, 판화가 내걸린 전시실이 나온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작품들은 다른 미술관에서 찾아 보기 힘든 10대 시절과 청년기에 그린 것이다.

미술관은 피카소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였던 하이메 사바라테스(Jaume Sabartes)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피카소는 1899년 부터 우정을 쌓은 사바라테스에게 많은 그림과 드로잉, 판화들을 주었다고 한다. 제법 작품들이 많아지자 그는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에 미술관을 지으려고 했지만 피카소의 반대로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말라가에서 태어났지만 14살 때 가족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사한 후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인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흑백 버전으로 그린 작품.
사바라테스는 피카소의 뜻에 따라 자신이 평생 모은 574점을 모태로 1963년 파라우 아길라(Palau Aguilar)에 미술관을 건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탄생하자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시에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할리퀸’(Harlequin) 등 다수의 작품을 기증했다. 여기에 미술관은 피카소의 지인들이 내놓은 작품을 포함해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4200여 점의 컬렉션을 갖췄다.

하지만 개관 당시 미술관은 피카소의 이름이 아닌, ‘사바라테스 컬렉션’이라는 간판을 달아야 했다. 스페인 내전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 프랑코에게 강한 적대감을 지녔던 피카소가 그의 체재 아래에선 ‘피카소 미술관’ 개관을 꺼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해온 바르셀로나 조셉 포라시오레스(Josep Porcioles)시장이 중앙정부의 입김을 차단하기 위해서 피카소 미술관을 시의 지원을 받는 기구로 출범시켰다.

이후 살바도르 달리, 동료화가인 갈라 달리의 ‘No 13’, 세바스티안 비달의 드로잉 7점(1899~1094년 제작) 등을 기증하면서 컬렉션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1968년 설립자인 사바레테스가 세상을 떠나자 피카소는 1970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920점을 미술관에 건넸다. 이들 가운데에는 그가 파리로 건너가기전까지 그렸던 ‘시녀들’(Las Meninas) 연작 50점과 청색시대의 작품, 학창시절의 스케치북 등 귀중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됐다. 1901~1904년에 제작된 청색시대의 작품들은 무명화가로 지내야 했던 우울한 시기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매춘부, 빈민 등을 모델로 검푸른색이나 짙은 청록색으로 표현했다.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에 자리한 피카소 미술관은 그의 청년기와 청색시대에 그린 작품들이 다수 소장돼 있다. 특히 스페인 출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을 오마주한 58점의 ‘시녀들’ 연작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시녀들’ 연작은 스페인이 낳은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동명의 원작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16살 때 처음으로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 접한 순간부터 매료돼 말년까지 수십여 년에 걸쳐 자신만의 58개 버전으로 재현했다. 실제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시녀들’은 제작 시기에 따라 크기는 물론 색상과 스타일이 다르다. 녹색이나 자두색, 검정색으로 배경을 그린 작품에서부터 벨라스케스의 원작과 비슷한 사이즈나 아담한 크기, 다섯살배기 공주 마르가리타만 있고 시녀들은 없는 그림 등 각양각색이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대표작은 ‘첫 영성체’(The First Communion·1896년 작)와 ‘과학과 자비’(Science and Charity·1897년)이다. 15살인 1897년에 그린 아카데미풍의 작품들로,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 받은 피카소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첫번째 영성체’는 그의 여동생 롤라(Lola)의 세례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주변 인물의 세심한 표정과 사물의 디테일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입체파의 대가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사실적인 화풍이 돋보인다.

13~14세기 중세시대의 궁전에 문을 연 피카소 미술관.
‘과학과 자비’는 죽음을 앞둔 여인과 초시계로 그녀의 맥박을 체크하는 의사, 수녀 품에 안긴 그의 어린 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의사와 수녀를 각각 과학과 자비로 상징하는 대상으로 표현한 피카소는 이 작품을 마드리드 미술학교 전람회에 출품해 가작을 수상했다.

그림 관람을 마치면 도예가로서의 피카소를 만날 수 있는 도자기 전시실이 기다린다. 피카소가 도예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이미 그의 독특한 회화 양식이 정점을 찍은 후였다. 옛 궁전의 방으로 꾸며진 도자기실에는 60대 이후 도자에 흥미를 느낀 피카소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재해석한 접시, 물병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출구에 자리하고 있는 아트숍에는 평생 5만 여 점을 남긴 피카소의 작품 이미지를 소재로 제작한 수천 여종의 아트상품이 진열돼 미술관을 떠나는 이들의 아쉬움 마음을 달랜다.

/바르셀로나=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734307200777686296
프린트 시간 : 2025년 04월 30일 14:3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