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 ‘남향집’ 창작은 1960년대 아닌 1939년”
김허경 전남대 학술연구교수, 도립미술관 오지호전 국제세미나서 주장
큰 딸 편지·팜플렛 등 자료 제시…미술계 ‘오지호 미술관’ 건립 목소리도
2024년 12월 09일(월) 19:45
‘남향집’
오지호 화백의 대표작 ‘남향집’의 창작연도가 1960년대가 아닌 1939년이라는 주장이 최근 열린 국제세미나에서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과 맞물려 오지호 작품들을 별도로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견해도 미술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남향집’은 오지호가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초당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가 1939년이라는 견해는 현재 도립미술관에서 진행 중(내년 3월 2일까지)인 ‘인상주의와 오지호: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전과 연계한 국제 세미나에서, 김허경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미술학 박사)가 주장했다.

김 교수는 지난 11월 28일 열린 세미나에서 ‘오지호화백작품전(1948) 해제와 ‘남향집’(1939)의 제작년도’를 주제로 발제문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이번 전시와 관련 전시구성에 따른 텍스트 작성, 아카이브 자료 수집 등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다. 전남대 미술교육과 졸업, 전남대 예술대학 1호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원 및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오지호는 1948년 10월(15일~18일) 광주미술연구회 주최와 호남신문사 후원으로 첫 개인전을 갖는다”며 “당시 전시는 1920년대 동경 유학기의 작품, 1930년대 개성 송도 시절에서 1940년대 후반 남도의 풍경까지 아우르고 있어 제작 활동과 화풍의 변화를 가늠하게 한다. 이 중에서 현재 ‘잔설’(1926년), ‘사양=남향집’(1939) 등 총 6점 작품이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팜플렛에서 소개된 ‘사양’은 오지호가 1968년에 출간한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에서 ‘남향집 1939년 작 (開城寓居)’로 표기되어 있다”며 “우리에게 알려진 ‘남향집’ 원제목이 바로 ‘사양’이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첫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목록 25번 ‘사양’은 1968년 발표한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에서 ‘남향집 1939년 작 (開城寓居)’로 표기되었다”며 “오지호는 팸플렛에서 ‘사양’에 대해 “초동 볕이 따뜻한 어느날 오후 남향된 초가집의 흰벽과 그 앞에서 있는 늙은 대추나무의 수많은 가지의 음양의 교차 이것이 화인이다”라고 직접 설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근거에 따르면 현재 ‘사양’은 2013년 2월 21일 등록문화재 제536호로 지정된 ‘남향집’과 동일 작품(원제)이다.

작품배경이 된 사랑채 초당 앞에서 찍은 오지호 장남 오영우, 차남 오승우, 부인 지양진의 조카 지정회(왼쪽부터).
김 교수는 남향집이 1939년도에 그려졌다는 사실은 오지호의 큰딸 영희씨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편지에는 “집은 송악산 밑 초당에 있는 초가집이 아버님의 대표작품인 ‘남향집’이고 그 바로 대추집이다. 안채는 방이 셋이고, 마루 부엌, 광이며, 사랑채는 큰방이 하나 있고 앞 마루가 있다. 바로 그 방이 아버님의 방이자 화실이었다”고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오지호가 살았던 개성의 초가집은 크게 살림집으로 사용한 안채와 맞은편에 화실로 사용한 사랑채가 연결된 ‘ㅁ’자형 구조”라며 “‘남향집’ 그림 속 초당은 안채가 아닌 사랑채 초당과 초당 앞에 있는 커다란 대추나무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학계의 논문 등에서 제기된 ‘남향집’의 1960년대 주장은 “‘남향집’ 배경을 개성 초당의 안채로 생각하고 오지호의 고향 화순 동복의 생가와 비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주일보 전신 옛전남매일신문(1977.12.21)에 공개됐던 1927년 신축했던 동복집(초가집이 아닌 ‘ㅡ’자형의 한옥)
‘남향집’이 1939년작이라는 사실은 유족이 제공한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 박사에 따르면 “한 장은 개성 안채에서 찍은 가족사진이고 다른 한 장(사진 오른쪽)은 바로 ‘남향집’ 배경이 된 사랑채 초당 앞에서 오지호의 큰아들 오영우, 둘째아들 오승우, 부인 지양진의 조카 지정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라며 “사랑채 초당 앞에서 찍은 사진과 ‘남향집’을 비교해보면 사랑채 초가집, 늙은 대추나무와 흰벽, 돌계단, 대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진 외에도 오지호의 막내달 오순영 씨는 지난 1월 24일 ‘김달진 미술사 이야기’ 유튜브에서 “화순 동복집은 1927년 지어진 한옥집으로 전남매일신문(1977년 2월 21일)에 게재된 사진을 보면 신축 연도와 ‘ㅡ’자형의 한옥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오순영 씨는 “아버지는 1945년 8월 18일 서울로 가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인가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념이 달라서 문을 닫는다. 47년까지 서울서 지내다가 48년 8월에 광주를 내려오고 이후 조대 교수를 했기 때문에 45년 3월부터는 동복을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순영 씨는 작품의 싸인만 봐도 아버지 작품 연도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지호라는 싸인을 1920년대는 점수(占壽)로, 이후부터 개성 풍경에 반해 한문으로 ‘지호’(之湖), 50년대 이후로는 영어로 표기를 했다”며 “‘남향집’이 60년대 작품이라면 싸인이 영어로 돼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남향집’의 싸인은 ‘之湖’로 표기돼 있다.

이 같은 여러 주장과 근거를 통해 ‘남향집’ 제작연도는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1960년대가 아닌 1939년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일보 전신 옛전남매일신문(1977.12.21)에 공개됐던 1927년 신축했던 동복집(초가집이 아닌 ‘ㅡ’자형의 한옥)
한편 오지호 작품을 광주에서 상시 볼 수 있도록 미술관이 건립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오건탁 화가는 “광주가 문화중심도시라고 불리지만 그에 걸맞는 콘텐츠를 갖추기 위해서는 오지호와 그 일가를 토대로 한 ‘오지호 일가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립미술관 이지호 관장은 “고향인 화순은 인간 오지호의 삶을 구현하는 기념관으로 활성화시키고, 광주는 예술가로서의 오지호 작품세계를 기릴 수 있는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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