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기행-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세기의 콜렉터 ‘구겐하임’… 운하의 도시 예술이 흐른다
미국 출신 구겐하임, 20대부터 예술가들과 소통
영국에 미술관 연 후 작가들의 ‘큰손’으로 불려
1차대전 후 베니스 정착…저택 개조해 미술관으로
엔디워홀·피카소·잭슨 폴록·칸딘스키 등
평생 수집한 현대 미술 거장들 작품 한자리에
2024년 11월 18일(월) 00:00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베니스의 운하를 마주하고 있다.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베니스 운하를 마주하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둘러봐야 할 코스다. 미국 출신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평생 수집한 20세기 유럽·북미 작가들의 작품을 모태로 1980년 그녀의 저택(Palazzo Venier dei Leoni)을 개조한 곳이다. 다른 유명 미술관과 달리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이라는 간판을 단 것도 그 때문이다. <편집자 주>

◇베니스 운하에 꽃피운 20세기 현대미술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으로 가는 길은 소문대로 ‘골목지옥’이었다. 구글맵을 켜고 나섰지만 좀처럼 행선지는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몇몇 사람에게 물어서야 가까스로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좁다란 골목을 지나 입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는다. 깔끔하게 단장된 수목과 각양각색의 꽃들은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정원 곳곳에는 알렉산더 칼더의 붉은 색 모빌과 데이비드 스미스의 조각상 등이 시선을 빼앗는다.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페기 구겐하임.
노란색 외관이 인상적인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응접실을 연상케 하는 로비가 나온다. 이 곳에 잠시 서자 철제 유리문 사이로 베니스 운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나무와 조각이 어우러진 예술정원이, 다른 한쪽에는 푸른 물결이 잔잔히 흐르는 수로가 마주보고 있는 구조다. 1749년 이탈리아의 유명 건축가 로렌조 보스체티(Lorenzo Boschetti)가 당시 베니어 가문(Venier family)으로 부터 의뢰를 받아 지은 건물로 세 개의 아치 구조물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비를 지나 복도로 발걸음을 옮기면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앤디워홀, 피카소, 잭슨 폴록, 칸딘스키 등 20세기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들이다. 과거 거실이나 주방, 게스트 룸 등으로 쓰였던 ‘아담한’ 공간에 내걸린 작품들은 대형 미술관과는 색다른 감흥을 전한다. 전시장 안에 설치된 소파나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다.

중세미술의 본고장인 베니스에 현대미술의 메카가 들어서게 된 데에는 페기 여사의 공이 크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지난 2017년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라는 다큐멘터리에 흥미롭게 담겨 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창립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의 상속녀로 태어나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잭슨 폴록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뮤즈이자 런던의 컬렉터, 후원자로 변신을 거듭하는 등 영화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옛 주택을 리모델링한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무명 화가들의 뮤즈이자 컬렉터, 후원자

페기는 유대인 출신의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이 본명인 그녀는 18세기 후번 광산으로 거부가 된 마이어 구겐하임의 후손으로, 페기의 아버지는 그중 여섯째 아들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타이타닉’에서 절대절명의 순간, 브랜디와 시가를 달라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벤저민 구겐하임이 그녀의 아버지다. 큰 아버지는 미국 철강계의 거물인 솔로몬 구겐하임으로,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 등을 거느린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을 설립한 주인공이다.

20대 초반 막대한 부를 물려 받은 그녀는 뉴욕 생활에 염증을 느낀 후 파리로 건너갔다. 수많은 남성과의 편력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파리에 머물며 5년간 동거한 예술평론가 존 홈스를 통해 마르셀 뒤샹과 만난 그녀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소통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안목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구겐하임 컬렉션의 정원에 자리하고 있는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 ‘Three Standing Figures’(1953년 작)
페기 구겐하임이 컬렉션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 된 건 1938년 영국 런던에 ‘구겐하임 죈 미술관’(Guggenheim Jeune Gallery·젊은 구겐하임)을 열면서부터. 첫 전시회의 주인공으로 ‘파리 현대예술의 선구자이자 대부’로 불렸던 장 콕토를 초대,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일약 런던 예술계의 여왕으로 떠오른 그녀는 알렉산더 콜더, 바실리 칸딘스키, 헨리 무어 등의 전시를 열고 그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뉴욕생활에 염증 느껴 베니스에 정착

컬렉션에 대한 집착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이어져 미술품들이 시장에 나오면 쓸어담기에 바빴다고 한다.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수많은 화가들이 그녀에게 작품을 팔기 위해 줄을 섰을 정도다. 1941년 나치가 유럽의 숨통을 조여오자 그녀는 미술품들을 가재도구로 위장해 미국으로 탈출, 이듬해 금세기 미술관(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오픈했다.

거실로 사용했던 전시실에는 피카소, 앤디 워홀, 칸딘스키,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파울 클레 등 거장들의 작품이 내걸려 있다.
무엇보다 페기 구겐하임이 현대 미술사에 공헌한 건 유럽 모더니즘 작가들을 미국에 진출시킨 것이다. 나치의 광풍으로부터 유명 작가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킨 게 대표적인 예다. 그녀의 도움 덕분에 가난한 화가였던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 윌렘 데 쿠닝 같은 화가들이 추상 미술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기의 뉴욕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랑을 경영하면서 재정난을 겪은 그녀는 당시 마침 프랑스문화원 공보관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 베니스에 들러 지금의 미술관에서 여생을 보낼 결심을 하게 됐다.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베니스에서 삶과 예술의 종착지를 보내며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탄생시킨 것이다.

페기 구겐하임은 이제 베니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복잡한 베니스의 골목길을 헤매더라도 매년 300여 만 명이 찾는 건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양질의 컬렉션이다. 작품 앞에 서면 누구나 저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희열에 빠지게 된다.

/베니스=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731855600776333007
프린트 시간 : 2025년 05월 14일 15:4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