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과 땀방울로 써내려간 동학농민군 공주전투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정선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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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전투는 전봉준 휘하의 남접 농민군은 물론이고 충청도와 경기도 및 경상도의 북접 농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였고, 공주지역의 토착 동학농민군도 함께 하여 치러낸 전투였다.”
오랫동안 충남 공주지역 중학교 교단에서 역사를 가르쳐온 정선원 공주동학연구회장은 기존 ‘남접(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 중심의 전투’로 이해해온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의 통설을 수정해 ‘남접과 북접, 토착 동학농민군이 연대한 전투’라고 새롭게 밝혀냈다.
동학과 공주전투에 대한 학문적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광대 대학원(지도교수 박맹수)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은 저자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2023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주전투에 대한 선행연구와 국내외 사료를 꼼꼼하게 살피고 공주지역 동학 전투지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구전(口傳)을 채록한 발품과 땀방울의 결정체다.
저자는 총 5부로 나눠 1,2부에서 동학사상과 동학농민군 2차 봉기, 공주전투 배경을 살핀다. 그리고 3, 4, 5부에서 남북접 동학농민군과 조일(朝日)진압군 사이에 22일간(음력 10월 22~11월 14일) 9차례 큰 전투가 벌어진 공주전투를 공간·시간별로 상세하게 규명한다. 공주전투를 크게 1차대치(10월 22일), 1차전투(10월 23~25일), 2차대치(10월 26~11월 7일), 2차전투(11월 8~9일), 3차대치(11월 10~14일)로 구분한다. 공주 동쪽 월성산과 능암산 사이 능티를 넘기 위한 1차전투(이인, 효포, 대교, 옥녀봉)와 공주 남쪽 우금티를 목표로 한 2차전투(우금티, 송장배미산자락, 오실산자락, 효포) 상황을 지도와 함께 생생하게 묘사한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과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북접은 1차전투때 효포전투에서 처음으로 회합했으며, 각자 독자성을 유지하며 전투를 수행했다.
저자는 남접과 북접, 토착 농민군이 연대한 공주전투 집결병력을 종래 3만~4만명을 뛰어넘는 10만명으로 추산한다. 무엇보다 10여 년 동안 공주 우금티 일대 사방 100리 안에 있는 모든 마을을 답사해 구전을 채록한 저자의 열정이 돋보인다. 이를 통해 관군과 일본군 기록에 누락돼 공백으로 남아있는 동학군과 지역주민들 활동상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콩나물 동이의 콩나물처럼 빽빽이’ 우금티 공격에 나섰던 농민군들은 ‘무르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 현저한 전력차이로 인해 끝내 고개를 넘을 수 없었다. 후일 일본군은 농민군 항쟁을 ‘청일전쟁 수행을 집요하게 막아 나선 유격전’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특히 송장배미와 혈저천, 보아티 들판(고개), 하고개 떼무덤 등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학살지의 흔적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부록으로 공주창의소 의병대장 이유상을 비롯해 임기준(이인), 장준환(공주), 김기창(정산) 접주 등 공주지역 농민군 지도자들과 남북접 농민군 관련 사료, 공주전투 관련 일지를 정리해놓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결론에서 “공주전투는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조선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제노사이드 사건이었다”면서 “그동안 우금티전투로 축소되어 인식되었던 공주전투는 역동적으로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주전투는 동학농민혁명뿐만 아니라 청일전쟁 전국(戰局)을 좌우할 정도로 장기적이며, 조직적이고 치열한 전투였다. 따라서 공주전투를 ‘패배한 전투’로 동학농민혁명을 ‘좌절된 혁명’으로 보았던 종래의 관점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모시는사람들·4만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오랫동안 충남 공주지역 중학교 교단에서 역사를 가르쳐온 정선원 공주동학연구회장은 기존 ‘남접(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 중심의 전투’로 이해해온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의 통설을 수정해 ‘남접과 북접, 토착 동학농민군이 연대한 전투’라고 새롭게 밝혀냈다.
![]()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불멸- 바람길’ 조형물.
<광주일보DB> |
저자는 결론에서 “공주전투는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조선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제노사이드 사건이었다”면서 “그동안 우금티전투로 축소되어 인식되었던 공주전투는 역동적으로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주전투는 동학농민혁명뿐만 아니라 청일전쟁 전국(戰局)을 좌우할 정도로 장기적이며, 조직적이고 치열한 전투였다. 따라서 공주전투를 ‘패배한 전투’로 동학농민혁명을 ‘좌절된 혁명’으로 보았던 종래의 관점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모시는사람들·4만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